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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촌동 맛집 (2019.4.15 업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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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업데이트를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틈틈이 정리해보려고 한다.

문제는, 음식이 나오면 사진을 찍기도 전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것..

일본식 


스즈란테이

'일본 가정식 백반'을 내세우는 식당. 연어(알)덮밥 짱. 돈까스는 진짜 짱. 
연어덮밥은 미타니야와 아지겐에서도 먹어봤지만 여기가 최고.
카레돈까스는 초초강추. 카레도 맛있고, 돈까스의 질은 지금껏 먹어본 중에 제일.
튀김덮밥도 엄청 맛있다. 새우튀김 아주 맘에 들었음.
스키야키 세트는 매우 짰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달고 짰음
해물나베 세트는 훈늉. 추울 때 먹으니 몸이 따끈따끈... 만족스러웠음
우동에 튀김 얹은 것을 시켰더니 정말 거대한 양파 튀김이 얹혀나왔음. 훌륭.

스즈란테이의 카레돈까스

스즈란테이의 튀김 덮밥


가격은 좀 된다. 식사 세트메뉴 1만4000~1만6000원 선. 
하지만 그 값을 한다. 몇 가지 세트메뉴에 딸려 나오는 차완무시도 훌륭.

이 집 시그니처 메뉴라고 할 도시락(1만5000원)은 절대 후회 안 함!

이촌동 큰길 지하에 있음. 그리고 오후 3시~5시는 준비 시간, 영업하지 않음.
예약도 안 받음. 

(참고로 이촌동 식당 중에는 준비 시간 두는 곳이 많음.)

미타니야(2018.12.30 업뎃)

자주 가는 곳들 중 하나. 치킨 가라아게 맛있음.
돼지고기+숙주볶음 등에 공기밥세트(밥+미소국) 시키면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두 명 이상이 먹을 수 있음. 

추천 메뉴는 치킨가라아게, 연어덮밥, 텐동(모듬튀김덮밥)
그리고 냉자루우동! 진짜 쫄깃탱탱 면발 alive임
이촌동 큰길,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음. 시설은 허름하지만 음식이 맛있으니.
다만, 당초 이 가게를 만들었던 일본인 미타니 씨가 스즈란테이로 옮겨가고 미타니야는 한솥도시락으로 넘어가면서, 
일본식 백반 분위기의 음식은 없어졌음. 점점 체인점 분위기로...


아지겐

여러 메뉴가 고루고루 다 맛있습니다. 셋이 가면 주로 돼지고기야채볶음이나 부추볶음 따위를 시켜놓고 백반(밥과 미소국)을 시킵니다. 그리고 치킨가라아게같은 메뉴를 시키고요. 겨울엔 굴튀김 짱. 

이촌 시장 골목 안에 있는데... 화장실이 문제. 저~ 멀리 시장통으로 들어가야 함.

봉린

예전엔 '아지겐'과 한자가 똑같은 '미원'이라는 이름을 썼었는데 '봉린'으로 바뀌었음. 2019년 3월에 가보니... 세상에나, 이렇게 가성비가 꽝이 됐을 수가!
이 동네에 매우 드물게도 내부에 화장실이 있어서, 술 한잔 할 때에는 여기가 훨씬 편해서 여기로 잡았다가 그만 亡... 나가사키짬뽕같은 해물국수도 치킨가라아게도 1만원대 후반(!) 가격인데 맛과 양은 깜놀할 정도로 효과 떨어짐. 특히 치킨가라아게는 배신이야 배신...


하찌방가이

상가 지하 아주아주 작은 일본식 함박집... 맛있음. 기름진 것이 땡길 때 추천.
함박스테이크를 중심으로, 베이컨 버섯 양파 계란프라이 등등의 사이드 식재료를 바꾼 여러 조합의 메뉴로 돼 있음. 맛은 대개 비슷하니 함박에 뭘 얹을 것인가 고민하면 됨. 함박의 소스가 맛있고, 카레도 조그만 그릇에 담겨 나오는데 살짝 매콤 맛있음.

이촌로 264 삼익쇼핑센터 지하1층.


사누끼우동

괜찮은 가격에 우동을 비롯해 여러 메뉴를 즐길 수 있는 곳.
스즈란테이의 저렴이 버전이라 보시면 될듯요. 사누키 세트(새우까쓰나베에 우동과 맛난 반찬을 줌), 모듬까스세트 등등 세트 메뉴가 양도 많고 가격도 1만1000~1만2000원대라 아주 착하고요. 우동은 대개 6000~7000원대. 


국화

사실 일식이라고 보기는 좀 그런, 한국식 퓨전?

낮에 가서 먹기엔 살짝 술집냄새(?) 나는 분위기.

저녁에 술 한잔 하기엔 좋음. 꼬치구이 괜찮음. 

다른 음식은....가성비가 아주 떨어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단히 뛰어나진 않음

가격은 꽤나 쎈 편. 조심해서 술 시켜야 합니다...


보천

전통의 일본 우동집... 최근에 없어졌어요 ㅠㅠ


동문우동집

우동 얘기 나온 김에... 여기는 '일본식 우동'이 아닌 '한국의 가락국수' 맛.
가격도 저렴하니 괜찮아요. 나름 유명하다는데 그냥 가성비 괜찮은 곳 정도.


모모야

1만원 안팎에서 돈까스 생선까스 등등과 일본 라면을 먹을 수 있음.

커틀렛 종류는 모두 훌륭. 뭘 시켜도 후회하지 않을 훌륭한 메뉴들...
하지만 라면이나 딴딴멘은 묽어요. 한국식...

기름 둥둥 뜬 돼지고기 국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섭섭할 수도.

여기도 본점(?)은 줄이 길어요. 강촌아파트 지나 금강병원 맞은편 쯤에 2호점 있음.


우메 스시

딱 한번 가봄. 왜냐? 비싸니까... 1인당 점심 스시코스 4만5000원....

기쿠 스시(안 가봄;;) 초밥 조리사가 나와서 차렸기 때문에 맛은 똑같다고.

비싸지만 먹다 보면 가격이 이해가 됨. 양이 너무 많아서 미처 먹지 못했어여 ㅠㅠ
질도 좋고 양도 많음. 뭘 몰라도 알아서 물어봐가며 주심. 알고 먹으면 더 좋겠지만....

고귀한 개불이나 익히지 않은 조개류 등등 이런저런 재료들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에겐 좋을 듯. 그렇지 않고 광어나 연어 등등 흔한 것들만 먹을 거라면 단품으로... 
돈 벌면 다시 가보리라....


기쿠

한때 꽤나 유명했던 이촌동 전통의 스시집.

손님 접대할 일이 있어서 저녁 오마카세 주문했는데, 세련되고 디테일한(?) 일식집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좀 별로라고 느낄 듯. 

1인 6만5000원인데 가격 대비 괜찮지만 생선보다 패류(개불 조개 전복 기타등등)가 많음.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 사람(=나)에겐 비추. 양은 충분하고도 남아서 몹시 배부름. 


중국음식


야래향 

이 동네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집. 다른 중국집들보다 가격대는 좀 높다.

면류, 밥류 등 식사 한 끼에 9000~1만3000원 수준. 하지만 it deserves! 

사천탕면, 팔진탕면, 류산슬밥 등등 모두 재료를 충분히 쓴다. 해삼도 뚱뚱하고.

처음 먹어보면 유달리 맛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하지만 먹다보면 다른 곳들과 비교됨. 
(이 집의 대표 메뉴라는 전가복;; 따위는 먹어본 적 없지만...)

이촌시장 부근, 용강중학교 바로 앞에 있음. 


한강춘 

야래향이 다소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흔한 '동네 중국집'인 이 집에 배달을 시켜봄.

탕슉이 예술임. 내 평생 먹어본 탕수육 가운데 최고였음.

다만, 한 번 밖에 안 먹어봐서... 고르게 그런 질이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음.

이촌동 큰 길에 있음. 


금홍

몇년 전만 해도 마파덮밥 등등 맛있었는데 지금은 별 특징이 없음.

이 가격이면 야래향을 가게써효... 그런데도 금홍엔 늘 사람이 많다능.

주로 교회분들(?)이 오시는 듯.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


한식


한강치킨

이정도면 '전통의 명가'. 무쟈게 맛있음. 

후라이드도 맛있고, 양념치킨의 양념은 아주 독특하면서 맛있음.

가격은... 가격은.... 나날이 올라서 지금은 반반 2만원...


스마일이촌떡볶이

용강중학교 바로 앞. 떡볶이 순대 모두모두 맛있는데 특히 라면이 맛있음.
김밥패러다이스나 김패밀리네 등과는 달라요~
집에서 끓인 라면 맛이랄까.... 이촌동에서 최고 유명한 맛집들 중 하나죠


일미 부대찌개

역시 애용하고 있음. 부대찌개 1인 7000원, 가격 대비 만족도 높음.

충신교회 옆골목


김선생

울가족 몇몇이 여기 김밥에 꽂혀서 무쟈게 많이 사다먹었음. 
그런데 본점
에서 가맹점들에 갑질한다 해서 좀....
여기가 김선생 체인 본점이라네요? ㅋ

먹어보면 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밋밋. 사실 이촌동 음식들 대부분이 그렇슴다.
대체로 '어르신 입맛'이랄까... 그것이 장점.

문 닫았음... 가게 괜찮았는데, 알고보니 김선생이 프랜차이즈 중에서도

가맹점 상대로 한 본사의 갑질로 유명했던 모양 ㅠㅠ


맛있는밥집

큰길가 지하에 '더맛있는밥집'이라는 한식집이 있는데, 이 집은 거기가 아니고 이촌시장 골목의 허름하고 작은 밥집입니다. 제육볶음 맛있다고 딸이 귀띔해줘서 다녀왔는데, 한껏 부푼 기대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식당이었어요!
셋이 가서 제육볶음 2인분과 순두부찌개 1인분을 시킴. 둘 다 맛있음. 제육볶음은 삼겹살로 만들어서 기름지면서도 양배추 듬뿍 넣어 생기발랄함. 순두부찌개는 김밥패러다이스류의 조미료맛과는 다른 시원한 맛. 나머지 반찬들도 다 맛있었음.
가격도 착해요 ㅎㅎ 


이촌동면옥

냉면도 모듬전도 너무 달아요 ㅠㅠ

한번 가고 가지 않음. 단맛 좋아하는 분들께는 가성비 괜찮을 듯


서양식


키친아이

국물 나오는 홍합 꼬제 맛있음.

샐러드도 훈늉하고, 브런치 메뉴도 괜찮음.

가격은 so so 수준. 하지만 최근 치즈 국물이 묽어진 듯한 느낌.


르미야

용강중학교 앞, 신용산초등학교 담장길. 작은 퓨전 레스토랑. 가격 합리적이고 맛도 있고... 요샌 키친아이 끊고 사실 이 집에 많이 다님.

자리 잡고 앉으면 맛뵈기 알콜 음료(술이라고 보기엔 좀 약하고)를 주는데 맛있음.

다만 요즘 이 집이 나름 이 동네 핫플레이스인지, 자리가 잘 안 나서 많이 기다림.

가게가 작아서... 테이블 4개.... 


르미야에서 먹은 카레덮밥인데...바삭한 튀김(뭔지 모름)도 맛있고, 얇게 썰어 얹어준 고기도 맛있었어요. 메뉴 이름은 까먹음...ㅠㅠ


기타


르번미

베트남 음식점. 용강중 앞, 신용산초 옆 샛길. 르미야 옆에 있어요. 쌀국수보다는, 상호에서 알 수 있듯이 번미(바게뜨빵에 베트남식 속을 넣은 것)가 주메뉴인 듯. 한 번 가봤는데, 그냥저냥 괜찮았어요. 편하게 갈 수 있는 곳.


디저트


동빙고

여기 빙수 먹다 보면 다른 곳 빙수 못 먹어요, 텁텁하고 조미료 친 것 같아서.

백설빙수는 환상적. 재료를 많이 쓰는지 유자빙수는 좀 많이 새콤달콤, 녹차빙수는 쌉싸름. 한방차 종류도 괜찮아요. 

그러나... 유명한 만큼, 기나긴 줄이 함정.


루시파이

충신교회 옆에 있음. 동빙고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달지 않은 파이, 집에서 만든 듯한(?) 따스함이 장점.

겨울에 맞은편 쑥탕에서 목욕하고 루시파이 가서 애플파이 먹으면 짱.

동빙고로 바뀌었어요


미스랄라

용강중학교 앞, 꽃가게 옆. 롤케이크 매우 맛있음.

주로 남의 집이나 사무실 방문할 때 사가지고 감

다만...혼자서 1개 먹으면 좀 느끼할 수 있음 ㅎㅎㅎ


맘마미아

이른바 이촌동 '로열 스트리트'... 즉 한강치킨 길에 있음

과일 잔뜩 올라간 파이 종류 다 좋아요. 너무 달지 않고 맛남!

이쁘게 포장해서 선물로 싸가면 사람들이 좋아함


브레드05

충신교회 뒤편, 이촌동면옥 앞. 가성비 높은 빵집.

어쩐지 살 많이 안 찔 것 같은 초코크림빵과 멜론빵 강추

가장 유명한 건, 살 많이 안 찔 것 같지는 않은 앙버터...

여름엔 여기서 옛날식 하드 사다가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지요


카페 모스(2018.12.30 업뎃)

음... 반숙카스테라가 유명한데, 먹고 나면 허망함. 스르르... 몇입 먹으면 사라짐
반숙카스테라는 신기한 맛에 한번 먹어볼만함. 아이스크림은 너무 달아서 싫음.
카페 엄청 시끄러운데, 뒤쪽 바깥 자리 앉으면 은근 분위기 있고 좋음

최근 리모델링. 특별한 건 없고... 정말 특징 없어짐

하지만 굳이 여기를 찾아가는 건, 이촌동이 스벅 폴바셋같은 대형 체인들로 채워지는 게 싫어서...

여름에 바깥쪽, 즉 한강맨션 쪽 야외 자리가 좋음


헬카페

한강맨션 상가 2층. 커피보다는 술 한잔 하러 가는 편이 나을 듯해요. 

커피값은 호텔 커피숍 값, 후덜덜... 


사이間(2018.12.30 업뎃)

한강치킨 옆 진짜 쪼마난 골목 안쪽에 있는 이자카야.

꼬치구이 엄청 맛있음. 다만 가격은 그리 싸지 않음
(그렇다고는 해도 어차피 허름한 이자카야;; 

다만 먹다 보면 생각보다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

맥주보다 사케 시켜놓고 안줏발 세우는 것이 좋더라고요 저는.

주방장님 바뀐 뒤로 꼬치구이 맛 없어짐........




가볼 곳들


교토마블(파크타워 지하상가)

수퍼판(장미맨션 1층)
모로미쿠시(파리바게트 옆골목)
이꼬이(이촌시장 골목)
아미월(충신교회 골목 부대찌개 옆)


이주에 관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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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 - 폴 콜리어

 

이주의 시대 - 스티븐 카슬, 마크 J. 밀러
국제이주의 역사와 현상과 광범위한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교과서'.

 

이주하는 인간, 호모 미그란스 - 조일준

 

모두스 비벤디 - 지그문트 바우만
"근대성이 지구를 정복하면서 나타난 치명적인,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인간쓰레기'를 처리하는 산업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상황인 것 같다. 자본주의 시장이 정복한 새로운 전진기지마다 땅과 일터, 공동체적 안전망 등을 이미 박탈당한 사람들의 무리에 수많은 사람이 새로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불필요해진 사람들의 수는 끊임없이 늘어나 지금은 지구의 관리 능력을 넘어설 지경이다. (50-51쪽)"

 

국가 경계 질서 - 가브리엘 포페스쿠 

 
세계경제와 도시 - 사스키아 사센 


로지스틱스 - 데보라 코웬 

 

화성 이주 프로젝트 - 스티븐 L. 퍼트라넥 


이주, 그 먼 길 - 이세기 


국경의 로큰롤 - 링쿠 센, 페칵 맘두 


개념으로 읽는 국제 이주와 다문화사회 - 데이비드 바트럼, 마리차 포로스, 피에르 몽포르테 


초국적 이주와 환대의 지리학 - 최병두 


동북아시아의 국제이주와 다문화주의 - 윤인진  


지역의 다문화와 결혼이주여성의 삶 - 정성미 


이주민의 에스니시티와 거주지역 분석 - 성공회대학교 노동사연구소

2019년에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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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률가들. 김두식. 창비. 1/4




2. 포스트 워. 토니 주트. 조행복 옮김. 플래닛. 1/21


3. 깨달음의 혁명.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사월의책 1/23


4. 내전. 조르조 아감벤. 조형준 옮김. 새물결 1/23


5. 도시의 역사. 조엘 코트킨.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1/27

책 자체는 도시의 기나긴 역사를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쭉 훑고 있고 논지도 명확해서 괜찮았는데, 번역이 엉망. 로마 인구 3000명, 숫자도 틀림. 플로렌스의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의 시러큐스... 모든 걸 '미국 발음, 미국 표기'로 만들어버림. 


6. 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2/8


7. 이탈리아 현대사. 폴 긴스버그. 안준범 옮김. 후마니타스 2/13


8.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김수영 옮김. 이산 2/23


9. 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에마뉘엘 제라르, 브루스 쿠클릭. 이인숙 옮김. 삼천리 2/24

벨기에 사람들이 읽기 좋게 쓴 루뭄바 이야기. 팩트들이 많고 재미있었는데 편집자가 꼼꼼히 다듬지 않은 티가 역력. 


10. 북극을 꿈꾸다. 배리 로페즈.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3/2


11. 스스로 치유하는 뇌. 노먼 도이지. 장호연 옮김. 동아시아 3/2

대체의학 같은 분위기의 책인데 의외로 좀 재미있었음.


12. 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인물과사상사 3/8

신문 기고를 모아놓은 것인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 내가 몰랐던 서울...


13. 무질서의 효용. 리차드 세넷, 유강은 옮김. 다시봄 3/22


14. 과거의 목소리. 사카이 나오키. 이한정 옮김. 그린비 4/3

사카이 나오키의 박사논문이라고. 영어로 쓴 걸 일본어로 번역하고, 아마도 그걸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듯. 문장이 사카이 나오키 스타일로 엄밀하면서도 복잡미묘난해하긴 하지만 읽고 나니 뿌듯. 


15. 함락된 도시의 여자. 익명의 여인. 염정용 옮김. 마티 4/17

도시에 관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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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제인 제이콥스

[도시의 역사] 조엘 코트킨

[도시의 승리] 에드워드 글레이저

[도시, 문명의 꽃] 앤드류 리즈

[세계의 도시를 가다 1- 유럽과 아프리카의 도시들] 국토연구원

[세계의 도시를 가다 2- 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도시들] 국토연구원

 

[이 도시에 살고 싶다] 경향신문 기획취재팀. 시대의창

 

 

[도시의 로빈후드 - 뉴욕에서 몬드라곤까지, 지구를 바꾸는 도시혁명가들]박용남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찰스 몽고메리

[반란의 도시 Rebel Cities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데이비드 하비

[도시는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월드워치연구소

[희망의 도시] 최병두, 강내희 외

[도시에 대한 권리] 강현수

 

[마을로 가는 사람들]인간도시 컨센서스

[지역의 재구성] 김범수 강내영 최정한

[국경 없는 세계에서 지역의 힘] 헬무트 베르킹

[지방소멸] 마스다 히로야

[로컬지향의 시대] 마쓰나가 게이코

[이토록 멋진 마을] 후지요시 마사하루

[그들이 사는 마을] 스콧 새비지

[노후를 위한 집과 마을] 주총연 고령기거주위원회

[뉴셸터스 : 난민을 위한 건축적 제안들] 프로파간다

 

[세계 경제와 도시] 사스키아 사센

[모두스 비벤디] 지그문트 바우만

 

[푸드 앤 더 시티]제니퍼 코크럴킹

[빵과 벽돌] 빌프리트 봄머트

[그린 어바니즘] 티머시 비틀리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히라카와 가쓰미

[인권도시 만들기] 강현수

[몬드라곤에서 배우자] 윌리엄 F. 화이트 & 캐서린 K. 화이트

 

[리듬분석]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앙리 르페브르

[인간과 공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공간적 사유] 마이크 크랭, 나이절 스리프트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스티븐 컨

[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 콜린 엘러드

 

[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그림자 박물관]제수알도 부팔리노

[근대 도시공간의 문화경험] 나리타 류이치

 

 

폴 긴스버그, '이탈리아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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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현대사를 연구한 학자 중에 꽤나 많이 인용되는 폴 긴스버그의 <이탈리아 현대사>(안준범 옮김. 후마니타스)를 읽었다. 600쪽이 좀 넘고, 뒷부분에 지도와 참고자료가 잔뜩 붙어 있으니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이탈리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의문은 '도대체 이 나라에선 10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였다.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나서게 만든 이민의 행렬, '백인'으로도 분류되지 못했던 미국의 이탈리아인들, 낙후된 농촌 사람들과 마피아, 스페인 내전 때 기차를 타고 우르르 공화국을 지키겠다고 찾아갔던 의용병들, 무솔리니와 파시즘, 돈 까밀로와 빼뽀네, 패션산업과 백색가전, 베를루스코니와 붕가붕가. 그밖에 내게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그려준 것들이 있다면 어릴 적 동화집에 나왔던 '롬바르디아의 소년 척후병', 이그나치오 실로네의 '빵과 포도주' 같은 것들이다. 좌우의 극한 대립, 왕정과 공화정, 남부와 북부, 바티칸과 공산당, 이런 것들이 몽땅 뒤죽박죽 섞인 것처럼 보이는 나라. 




책은 1943년부터 1988년까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치사 중심으로 소개한다. 굳이 '정치사'라고 한 건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와 기독교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파 세력의 대립과 타협을 가장 큰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세력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그것이 정책으로서 어떻게 나타났는가가 책의 큰 줄거리다. 그 사이사이, 그들을 특정한 행위로 나아가게 한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움직임이 들어가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뒤섞인 복잡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좌우의 정치진영이 만들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의 저변에서 무시 못할 힘을 형성했다. 하지만 소상공인들 중심의 구조에 토리노의 피아트가 대자본으로서 너무나 막강한 권한을 갖는 상황에서, 그리고 소련 사회주의의 외피 혹은 압박 속에서, 좌파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쳤고 결과는 늘 '타협'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농촌 지역은 낙후된 채로 오랜 시간 소외를 당했고, 전후 고도성장 기간에 이농과 사회변형이 일어났고, 위기와 행동과 타협의 순환이 이어졌다. 경제는 발전했으나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치는 불안정한 이탈리아. 책은 1980년대 말까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에도 아주 기본적이고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어떤 나라 혹은 지역을 이해하는 건 참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조차 해석하기 힘들고 온갖 분석이 난무하는 판에. 한번 가보지도 않은 외부자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기는 더더욱 어렵다. 층층이 쌓인 사회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기본지식을 쌓으려고 할 때엔 이렇게 '교과서적인' 책이 참 많이 도움이 된다. 


번역은 훌륭하고, 책 만듦새야 뭐 말할 나위가 없다. 후마니타스의 윤상훈 편집자를 만나 "책 너무 잘 만들었다"고 했더니 살짝 웃었다(이분은 원래 살짝 웃는다). 


레지스탕스 


통일된 국가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어두웠던 순간에, 남과 북에서 침략을 받던 반도에, 비록 아주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소수의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신이 태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은 많다. 그리스의 케팔로니아 섬에 주둔하던 이탈리아 수비대원 1만여 명은 전체 투표를 통해 독일에 투항하기를 거부했다. 그들 가운데 96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요 도시들에서 조직적인 대독항쟁은 없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장차 다가올 길고 고단한 전투를 준비하려는 개인들이 고립된 채로나마 존재했다. (26쪽)


1943년 9월 중순에 이탈리아는 둘로 쪼개졌다. 나폴리 남부에는 연합군과 이탈리아 국왕이 있었고, 이들은 마침내 10월 30일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은 감옥에 있던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데려갔다. 그는 곧 북부 괴뢰 공화국의 수장으로 되돌아왔다. 이 공화국은 가르다호 서쪽 기슭에 있는 작은 휴양지 살로에 수도를 정했다. 나이 들고 기가 꺾인 무솔리니는 이제 독일의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독일이 명령을 내렸고, 첫 명령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 절멸 수용소로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 귀도 콰차는 이탈리아의 반파시즘을 세 부류로 나눴다. 우선 전통적인 조직적 반파시즘 세력이 있다. 두번째 부류는 파시즘 치하에서 자라났지만 무솔리니가 축출된 7월 25일 이후에 새로운 삶이, 아니 삶 그 자체가 시작됐다고 느꼈던 많은 청년들의 자생적인 반응으로 나왔다. 세 번째 부류는 파시스트들 사이의 반파시즘으로, 이들은 항상 정권을 지지했지만 이제는 가라앉는 배를 버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인 조직화된 정치적 반파시즘 세력을 지배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 여럿, 그람시, 움베르토 테라치니, 잔 카를로 파제타 등은 파시스트 특별 법정에서 장기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부는 그람시처럼 이런 시련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당은 조직의 외형을 이어갔으며 가장 중요한 공장들에서 세포를 유지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을 위해 싸웠던 3천 명 이상의 이탈리아인들 중 절대다수가 이 당에서 배출되었다. (27쪽)


1943년 말에는 약 9천 명의 빨치산이 있었다. 사상자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왜냐하면 대개 퇴역 장교들이 지도한 많은 부대들이 재앙으로 끝나 버린 회전을 펼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빨치산과 동조자들은 나치에 의해, 그리고 살로 공화국의 파시스트 무장단체인 블랙셔츠 부대에 의해 지독히도 잔혹한 공격을 받았다. 1943년 9월 독일은 민간인을 상대로 처음으로 학살을 자행했는데, 피에몬테의 보베스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주민들을 산 채로 태워죽였다. 이런 보복에도 불구하고 빨치산 운동은 1944년 봄에 2만~3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30쪽)


1945년 5월 1일이 됐을 때 북부 이탈리아 전체가 자유였다. 해방이 봉기를 통해 민중적으로 이뤄졌다는 특성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대부분의 집단이 그 해방을 환영했다. 물론 끔찍한 보복이 이어져 해방 직후에는 무려 1만2000~1만5000명이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104쪽)


[연합군에게] 이탈리아인들의 독립적인 활동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 단계에서 연합국과 대치한다는 위험 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

레지스탕스는 결코 연합군 앞에서 굴종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종속적이었다. 연합군의 연락관들은 빨치산 부대들의 무장을 최대한 신속하게 해제했다. 

연합군은 민족해방위원회를 대안적 권력자원으로 건설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동시에 경제적 조건이 열악해 북부 노동계급이 거리로 나가 저항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연합군은 모든 해고에 즉각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동의했다. (105-107쪽)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수는 적극적 활동가 10만여 명과 동조자 수천 명에 달했다. 그 중 3만5천명이 죽고 2만1천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9천명이 독일로 추방당하는 등 정규전에서보다 사상자 수는 더 많았다. 

무솔리니 정권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인들을 경멸하고 신뢰하지 않던 시기에, 빨치산들은 이탈리아의 손상된 이미지를 구원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더욱이 그들은 오래 지속된 반파시즘 전통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빨치산의 투쟁목표는 상당 부분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107-108쪽)


1940년대 초 이탈리아 사회


파업은 공업 삼각지대를 넘어 베네토주의 직물공장들과, 중부 도시들인 볼로냐와 피렌체에까지 확산됐다. 여성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

추축국이 패배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주요 자본가들은 전후 상황에 대비할 계획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피아트 회장 조반니 아녤리와 경영자 비토리오 발레타의 행위가 가장 간교했다. 1944년 4월에 피아트의 부회장은 이탈리아의 지리적 입지와 낮은 노동비용이 미국에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앨런 덜레스에게 전하라는 위험한 사명을 띠고 알프스를 넘었다. 피아트는 독일의 생산의뢰서를 연합군에게 넘겼고, 어느 수준의 생산을 허용할지를 연합군과 비밀리에 합의했다. 


1956년, 비토리오 발레티(맨 오른쪽)와 잔니(조반니) 아녤리. www.lastampa.it


동시에 발레타는 독일과 파시스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고, 자기 공장들에 있는 반파시즘 활동가들을 구하려 들지도 않았다. 1945년 4월에 빨치산들이 부역행위 혐의로 발레타를 체포하러 갔을 때, 저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영국군 장교였다. 그는 발레타를 대신해 안전통행증을 보여주었다. (39-40쪽)


마피아라는 용어는 1865년 공문서에 처음 나왔다. 마피아는 불신이 만연할 때 보증을 제공하거나, 좀 더 일반적으로는 보호를 제공하는 행동대이다.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는 결코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 서로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쟁적인 집단들, 즉 '패밀리들'이었다. 그들이 제공한 서비스는 이런저런 독점들을 폭력으로 유지시켜주는 것이었다.

마피아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피아에 상응하는 칼라브리아의 은드라게타는 중간계급이 활력을 보이는 농촌 지역에서 융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농촌의 이 체티메디에게, 마피오소[마피아 단원]가 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길이기는 하지만 지위와 권세와 부를 얻는 길이었다. 더욱이 마피아와 은다라게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외부의 개입에 직면해 현지의 충성심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피아는 강도에, 농촌 절도에, 경쟁 마을의 주민에, 무엇보다도 자기들 자신에 대처하는 보호를 제공했다. (56쪽)


공산주의자들


1944년 3월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가 모스크바에서 돌아왔다. 1921년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립한 주역인 톨리아티는 파시즘이 발흥한 뒤 러시아로 망명했고 코민테른 부비서가 됐다. 영민하고 신중하며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오만한 톨리아티는 남다른 생존능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면서도 톨리아티는 교조와 신앙주의 fidelism로 유명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데 탁월했다. (68쪽)


Togliatti with a copy of L'Unità newspaper, in 1950s. _ WIKIPEDIA



그람시는 '진지전'이 궁극적인 혁명적 권력 장악을 불필요한 일로 만든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가 역설했던 것은 헤게모니를 창출하는 장구한 과정 중에서 '집단적 지식인'인 중앙집중화된 혁명정당이야말로 사회 내부의 반자본주의 세력들을 조직하고 조정하며 지도하는 견인차라는 점이었다.

이런 틀에 대한 톨리아티의 해석은 전적으로 고유한 것이었다. 동맹을 창출함에 있어서 톨리아티가 강조했던 것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건설되는 동맹인 사회적 동맹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가는 정치적 동맹이었는데, 특히 기민당과의 동맹은 그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이고 지난한 동맹이 될 것이었다.

한편에 있는 '독점' 자본주의와 다른 한편에 있는 잠재적으로 '진보적인' 소기업 경영자들을 구별한 것도 전적으로 톨리아티의 시도였다. 또한 그는 시민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장치 안에서도 선거주의를 동반한 장정이 필요하다 여기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서 권력의 진지들을 점유하는 데 주력했다. 마지막으로 톨리아티는 '진지전'과 '기동전' 사이의 가능한 연계를 모조리 지연시켰고 결국에는 후자가 소실되고 말았다.

톨리아티는 무엇보다 공산당을 소규모 전위 집단에서 시민사회 안의 대중정당으로 변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톨리아티가 새로운 당을 위해 선택한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를 과연 그람시라면 동의했을지. 하지만 톨리아티가 명확함과 역동성을 가지고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대중적인 공산당 정치문화를 건설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공산당은 모든 극단주의적 유혹을 피했고, 노동계급을 불가능한 혁명으로 이끌지 않았다. (72-73쪽)


데가스페리와 기민당


1945-47년에 중앙행정부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이 시기 내내 톨리아티가 법무장관이었음에도 사법부의 구조와 구성, 충원방식을 변경하려는 조치는 없었다. 숙정위원회의 초반 활동은 최악을 섞어버렸으니, 다수의 주도적인 파시스트들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파시즘 평당원들만 죄인 취급하는 경향을 보였다. 숙정을 면한 사법부는 되도록 많은 소송을 기각시켰다. 주도적인 파시스트들이 터무니없는 근거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46년 6월 톨리아티는 숙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사면 작업을 기초했다. 심지어 고문을 자행한 파시스트들도 재판을 면했다. 

이 시절 막바지에 기민당 장관들이 민족봉기 직후 행정부에 들어온 빨치산과 반파시스트를 상대로 벌인 숙정만이 실효성을 지녔다. 기민당 지도자 알치데 데가스페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북부이탈리아민족해방위원회가 임명한 지사들을 자신이 선택한 경력직 공무원들로 교체했다. 그리고 1947-48년 기민당 내무장관 마리오 셸바는 1945년 4월에 들어온 상당수의 빨치산을 경찰에서 숙정했다. (137-138쪽)


1947년 2월에 서명된 평화조약의 세부내용은 데가스페리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획득한 식민지를 비롯해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됐다. 총 배상금 3억6천만 리라를 러시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에티오피아에 지불하게 됐다. 특히 이스트리아 반도 대부분이 유고에 돌아갔음에도, 트리에스테마저 이탈리아 영토로 남는 것이 아니라 국제 감시하의 자유영토가 돼버린 끔찍한 상황이었다. (163쪽)


데가스페리는 교회 상층부가 정부 안에 좌파가 들어와 있는 것을 목도하면서 기민당을 버리기 시작했다고 의심했다. 

라테란 협정은 3월 24일에 이미 승인됐다. 이제 단절의 때가 왔다. 그를 고무한 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었다. 하나는 5월 9일에 전후 최초로 프랑스가 공산당을 정부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한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 대외정책의 급속한 진화였다. 이제 미국은 이탈리아 상황에 관해 반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탈리아 군대에 염가로 무기를 판매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5월 1일에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로마 주재 미국 대사 제임스 던에게 서한을 보내, 10월 총선의 위험을 예상하면서 데가스페리가 공산당을 빼고 통치할 것을 요구했다. (164쪽)


De Gasperi addressed the crowd in Bologna, 1951 _ WIKIPEDIA



5월 1일 팔레르모현의 농민들이 노동절을 기념하며 포르텔라 델레 지네스트레에 모였다. 제화공 자코모 스키로가 연설을 시작했다. 갑자기 주변 언덕 위에서 경기관총이 군중을 향해 발사됐다. 마피아의 공격으로 11명이 죽고 65명이 부상당했다. 이 일 뒤 5월 13일 데가스페리가 사임했다. 그러나 새 정부 구성 임무는 결국 데가스페리에게 돌아갔고, 그는 의회에서 모든 우파 정당의 지지를 받아 중도 정부를 구성하겠노라고 발표했다. 결정적인 신임투표가 1947년 5월 31일에 있었다. 274표 대 231표로 제헌의회는 반파시즘 연정의 종언을 확인했다. (165쪽)


1948년 총선과 미국의 개입


미국의 개입은 규모와 기발함, 그리고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면에서 경악스러웠다. 미국 정부는 1948년의 첫 3개월 이내에 이탈리아에 1억7600만 달러의 '잠정원조'를 결정했다. 그 이후 마셜플랜이 전면화됐다. 

제임스 던 대사는 식량과 약품 등을 실은 1백번째 배가 도착할 때마다 특별한 축하행사를 열었다. 도착 항구는 매번 달랐고 던의 연설은 매번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었다. 다리나 학교나 병원이 미국의 원조로 새로 지어질 때마다 대사는 지치지도 않고 반도를 종횡하며 미국과 자유세계의 이름으로, 그 이름 안에 기민당을 암시하며 연설했다. 종종 항구에 풀지 않은 재화를 '우정의 기차'에 실어 해당 역마다 정해진 행사를 하고 나눠줬다. 1948년 3월 20일에 조지 마셜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탈리아 원조는 모두 즉각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질적 원조에 수반된 것은 트리에스테의 미래라는 결정적 질문에 관한 적시 개입이었다. 총선 한 달 전에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도시가 다시 이탈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리라고 약속했다. 

미국 내의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대규모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회가 기민당에 유리한 각종 선전을 고안해냈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지지 메시지를 녹음했고, 집회가 열렸고,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100만 통이 넘는 편지들이 이탈리아로 발송됐다.

다른 개입이 다 실패하는 경우에 남는 것은 군사적 개입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민전선이 승리하는 경우에 대비해 다양한 행동계획을 검토했다. 트루먼은 좌파의 통일이 깨지도록 사회당 측을 회유하고자 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비밀 조직들의 자금과 무기를 원조해 반공 봉기를 권장하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군사적으로 직접 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지중해 함대를 증강했고, 총선 전 몇 주 동안은 미군 군함이 이탈리아 주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프라하의 공산당 쿠데타는 이탈리아 총선에서 좌파가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망쳐놨다. 기민당은 국내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맹렬한 전방위적 개입 덕도 톡톡히 보았다. (170-172쪽)


기민당과 국가


이탈리아 관료제의 역사는 법률과 법규와 회람과 내부 지령의 공표를 통해 행정부 활동을 세세하게 규제한 역사이다. 그런 체계의 의도는 관료제의 자의적 권력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으나 실제 귀결은 10만 여개의 법률과 지령이 행정부 활동을 규제하면서 빚어진 혼란과 상명하복의 공무원 조직이었다.

...세번째 특징은 공무원 조직이 곧 후견주의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까지도 공무원 조직은 북부, 특히 피에몬테 출신들에 장악돼 있었다. (213-214쪽)


마지막 특징은 '병렬 관청' 현상이다. 20세기 벽두부터 각료 휘하의 전통적인 관료 부서가 아닌 특수 공공기관(엔티 푸블리치)을 세우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통합적인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련의 독립적인 기관들이 커졌고, 이런 기관들은 국가 안에 자신들만의 권력 지대를 별도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컸다. 파시즘 시기에 이런 특수기관들이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1922년부터 1940년 사이에 260개 기관이 창립되었다. (215-216쪽)


[이런 기관들 중 일부는] 엔티 이누틸리(무용한 기관)라고 알려졌다. 이들의 활동은 왕왕 중복됐고 사소한 목적에 국고를 탕진했으며, 그러고도 1943-48년 시기에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유대계 몰수자산 관리기구인 EGELI(자산관리청산청)는 1950년에도 운영되고 있었다. 변경지대 아동을 지원하는 ONAIRC(국립변경지역유아지원사업단)도 운영됐다. 1919년 창립된 이 단체가 파시즘 치하에서 맡았던 임무는 북동부 변경에 사는 독일어 사용 아동과 슬로베니아어 사용 아동의 국적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의회는 1976년에야 이 단체의 폐지를 가결했는데, 그때까지 이 단체는 국가에서 연간 50억 리라 이상을 수령했다. ONOG(국립전쟁고아지원사업단)는 700명의 고아를 돌보는 데 120명의 직원을 고용했고 1975년에는 10억 리라의 수입을 거뒀다. 이 기금 중 단 20%만이 고아들에게 돌아갔다. (223쪽)


ENI와 기민당 치하의 경제


자본가계급과의 관계에서 데가스페리의 초기 해법은 콘핀두스트리아 의장인 안젤로 코스타와 아주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가스페리는 물론, 그를 승계했던 이들도 경제계의 파워 엘리트에게 단순히 복무하는 데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 자체가 경제적 힘의 주요 보관소가 되게끔 만들려 했다. 카사페르 일 메초조르노와 ENI(국립탄화수소청) 같은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고 은행 체계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높이고, 공영기업의 성장을 장려하는 것 등에 의해서 말이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첫 물결은 1956년 국가자산부 장관직을 새로 만들면서, 그리고 이듬해 IRI(산업재건공사) 산하의 모든 회사들을 콘핀두스트리아에서 빼버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거대 전기기업들은 ENI가 성장함에 따라 위협받았고, 1955년 이들의 입맛에 맞는 알리기에로 데 미켈리가 코스타의 후임으로 콘핀두스트리아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이면 경제 엘리트와 지배 정당 사이의 힘의 균형이 후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당히 옮겨 갔음이 뚜렷했다. (229쪽)


1948년과 1952년 사이에 유럽부흥계획 기금에서 14억 달러 이상이 이탈리아로 갔는데 이는 유럽에 지원된 총 기금의 약 11%였다. 

프로그램 첫해에 곡물과 석탄 수입이 아주 두드러졌고 석유산업 역시 특혜를 받았으며 1950년까지 대충기금은 주로 이탈리아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늘리고 통화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뒤에는 두 가지 상이한 방향이 압도적이었다. 하나는 국영 산업과 민간 산업을 위한 기계류 구매에 사용하는 기금이 늘어난 것이었다. 주요 수혜자들 중에는 피아트, 핀시데르(IRI의 철강회사), 에디손 열전기 회사들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남부를 대상으로 기금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카사 페르 일 메초조르노와 농업개혁청이 주요 수령자가 되었다. 마셜원조 지출 유형은 부분적으로만 미국의 지시에 부응했고,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정재계 엘리트 내부의 상이한 이해관계와 여론의 조합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모든 서유럽 정부들에게 경제적, 군사적 협력을 지향하라는 압력을 가했지만 데가스페리는 이에 순응하려는 욕망 이상으로 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로베르 쉬망과 콘라트 아데나워처럼 그는 여러 민족들이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야심이 충돌한 탓에 늘 고통을 겪었던 유럽의 변경지역(트렌티노) 출신이었다. 게다가 초보 정치인으로서 그의 형성에 강한 표식을 남긴 것이 가톨릭 국제주의였다. (223쪽)


Enrico Mattei during a speech. _ WIKIPEDIA



특수기관들의 영역에서 나타난 대혁신은 ENI의 창립이었다. ENI는 엔리코 마테이가 낳고 키운 기관이었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그만둔 뒤 심부른꾼 일로 시작해 무두 공장 일을 했고 그 뒤 밀라노에서 산업장비 영업 일을 했다. 전쟁이 터지자 화학회사를 차렸고 1943년 이후에는 기민당 빨치산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전후에 마테이는 국영 석유회사 AGIP를 책임지게 됐는데, 이 회사는 파시즘 치하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46년과 1949년에 포 계곡에서 대량의 메탄이 발견되면서 마테이는 회사를 회생시켰다. 마테이는 포 계곡의 천연자원 독점 개발권을 따내려고 민간 기업과 싸웠다. 그가 이겨서 1953년 2월 10일에 ENI가 생겼다. 

그 다음 9년 동안 마테이는 국영 부문 내에서 독보적인 산업 제국을 세웠다. ENI는 다섯 개의 주요 사업회사를 통해 당황스러워질만큼 많은 활동들에 손을 뻗쳐 갔으니 석유화학, 아우토스트라다와 모텔, 합성고무, 강철배관, 도급 토건, 섬유, 핵 발전과 연구 등을 망라할 정도였다. 마테이가 고용하고 훈련시킨 기술직들은 얼마나 유능했던지 국제적인 명성이 자자했다. ENI의 활동 덕택에 이탈리아의 얼굴은 변했다.마테이는 ENI를 사저인 영지처럼 운영했고 후견주의적 관행이 조직 전반에 만연해 있었다. (238-239쪽)


기민당은 무계획적이기는 했어도 여하튼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경제력 및 국가가 시민사회에 개입하는 능력을 키우려고 의식적이고 성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주로 정부 특수기관들-카사 페르 일 메초조르노, 마테이의 ENI-의 확대된 권한과, 공업 부문에서 인정된 국가자산을 활용했다. 특히 남부에서 후견주의는 이제 지역 명망가가 아니라 국가공무원과 당 고위층의 특권이 되었다.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기민당이 노동계급 운동을 박살낸 것을 크게 고마워했다. 남부 토지엘리트들에게도 위안거리가 있었다. 몰수 토지에 대한 정부의 후한 보상 덕분에 남부 도시들의 건축 투기에 성공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67쪽)


남부에서는 공공사업 프로그램과 건설 붐 덕분에 도시 실업자 수만 명에게 일자리가 생겼다. 남부 농촌으로부터의 첫 이주 물결이 이 시기에 일어났으며, 구릉지의 농민들은 지방 중심도시들로 내려와 건설 노동자가 됐다. 이런 새로운 현장에서 노조운동은 허약했고, 친족 관계와 후견주의적 관계가 지배적이었다. 1950년대 내내 기민당은 이런저런 연정을 통해 모든 주요 도시 평의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269쪽)


공산당


당원 수가 1954년에는 214만5317명에 달했지만 이 숫자는 사회에서 당이 고립된 현실은 은폐했다. 정치연합은 이미 1947년에 기각됐고 계급동맹은 냉전이 고조되면서 어느 때보다도 벅찬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풍부한 조직 및 활동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당원들을 단결시켰다. 

가장 중요한 제도들 당 밖의 제도들 중 하나는 공산당과 사회당이 함께 활동했던 카세 델 포폴로(인민의 집)였다. 이는 특히 중부와 소도시들과 농촌에서 마을공동체 생활의 초점이 되었다. 카세가 입주한 건물들 중 다수는 전쟁 막바지에 파시즘 정당으로부터 몰수했거나 되찾은 자산이었다. 1952년에 재무장관은 이 모든 건물이 정부 자산이라고 결정했고 1953년과 1955년 사이에 다수의 카세 델 포폴로가 폐쇄됐다. (284쪽)


1953년 3월에 스탈린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공산당은 상복을 입었다. 스탈린을 초인적인 아버지 같은 존재로 격상했을뿐더러 당은 소련을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문제들이 해결된 사회처럼 묘사했다. 그렇지만 가장 유해한 요소는 이런 평가가 아니라, 당의 활동과 생활에 퍼져 있던 태도였다. 지도자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전통이 이탈리아에서도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당의 역사적 지도자들인 그람시와 톨리아티의 저술들이 마치 성서 구절이나 되는 것처럼 인용됐다.

공산당이 러시아에서 가져온 마지막 요소는 위계적 조직과 내부 민주주의의 결여였다. 권력은 당 사무국 수중에 집중됐다. (288-289쪽)


에밀리아로마냐의 여성 공산당원들을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일부 계획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에밀리아의 최대 도시인 볼로냐가 공산당 지방정부의 시범이 되었다. 시의회는 1946-56년 아홉 개의 학교, 896동의 아파트, 31개의 유아원을 짓는 데 성공했다. 8000명의 아이들이 보조금이 지원되는 학교 급식을 먹었으며 배수시설과 가로등, 시립 빨래방이 세워졌고 대중교통과 보건서비스가 크게 향상됐다.

이탈리아의 다른 많은 부분들에서 혼돈과 부패가 만연한 것과 대조적으로 볼로냐 시의회는 이 시절 단 한번도 적자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능률적이고 설명했다.

자신감을 얻은 공산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이행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사례이자 모델이 볼로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오힐려 에밀리아의 경험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따른 효율적이고 인간적인 관리였다. (295-296쪽)


1956년 이후로 좌파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월 러시아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했던 보고는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공개된 부분에는 상이한 나라들이 상이한 수단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가능성에 대한 새롭고 유의미한 준거가 있었다. 하지만 진짜 폭탄은 보고서에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었다.

두번째 부분은 이내 서방언론에 유출됐고, 이탈리아 우파에게 이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누오비 아르고멘티' 1956년 5~6월호 인터뷰에서 톨리아티는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 사상가이자 전략가인지를 보여줬다. 그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폭로를 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폭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톨리아티가 원했던 것은 '개인숭배'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스탈린이 저질렀던 일이 어떻게 그리고 왜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능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급진적인 접근이었고, 서구의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의 반응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톨리아티는 이 인터뷰에서 그의 유명한 다중심주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이 더는 소련이라는 유일한 중심에 입각하지 않고 다중심적으로 됐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 인터뷰는 스탈린주의가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의 합을 훨씬 웃돌며 늙은 표범의 반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 또한 드러냈다. 톨리아티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우리를' 스탈린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에 '익숙해지도록 했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자행된 범죄들을 모른 체하려던 것이었다. 톨리아티는 1930년대에 코민테른의 부비서였고, 적어도 '개인숭배'와 스탈린 독재의 목격자였음이 분명했다. 

톨리아티의 인터뷰는 혁신과 도그마를 명민하게 결합시켜 당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분명 도움이 됐지만, 평범한 당원들의 불안과 사기 저하를 감추지는 못했다. (297-298쪽)


6월 하순에는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가을에는 러시아가 헝가리 봉기를 무장 진압한 여파로 서유럽 당들에서 수만 명의 투사들이 공산당을 떠났다.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러시아의 침략을 지지했다. 평당원들, 특히 당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헝가리에서 일어난 비극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번져갔다. 12월 이탈리아공산당 제8차 대회 뒤 졸리티, 푸리오 디아츠, 파브리치오 오노프리, 에우제니오 레알레가 출당되거나 은퇴하기로 했다. 대대적인 탈당이 있었으니, 아멘돌라는 1955-57년에 40만 명을 잃었다고 추산했다.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당을 떠났는데 이 중에는 저명한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와 역사가 델리오 칸티모리도 있었다. (300-301쪽)


경제 기적


확실히 전통적 보호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45년 시점에 경제구조가 유사했던 프랑코의 스페인이 유럽 무역 주류에서 고립돼 있던 데 비해,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통합의 전면에 있었다. 이탈리아 공업의 기술공학적 수준 및 생산물 다양성은 공동시장의 창출에 긍정적으로 대처하기에 충분했다. 어디에서든 도전에 응할 준비가 된 기업가, 기술자, 디자이너, 숙련 장인이 있었다. 

1953년 비토리오 발레타는 피아트 최신 모델을 만들 대규모 생산라인에 집중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2년 뒤 피아트의 신형 자동차 세이첸토가 토리노 시내를 다채로운 색상으로 채우며 누빔으로써 누구나 자동차를 모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에 ENI와 에디손과 몬테카티니가 벌인 치열한 경쟁은 이탈리아의 석유화학 산업과 합성고무 및 비료 생산에서 대약진이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됐다.

보호주의의 종언은 생산체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근대화를 압박했으며 이미 그렇게 움직이던 부문들에는 보상을 주었다. ENI가 발파다나에서 메탄과 탄화수소를 발견한 것과, 마테이가 저렴한 액체 연료[석유]를 수입한 것이 석탄 수입을 대체한 대안을 제공했고 그 덕분에 기업가들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IRI의 후원 아래 오스카르 시니갈리아가 현대적인 철강업을 역설한 것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시니갈리아의 지도 아래 핀시데르는 승승장구했고, 1950년대 내내 이탈리아 기업가들에게 철강을 매우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제 기적'은 당시 만연한 값싼 노동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전후에 노조의 힘은 파괴되었고 생산성과 착취를 증진시킬 길이 열렸다. 대외적으로 유럽경제공동체가 내세운 자유무역이라는 신조는 대내적으로 노동현장에서 고용주의 자유와 짝을 이뤘다. (308-309쪽)


가톨릭


1958년 비오12세의 죽음과 안젤로 론칼리가 요한23세로 선출된 일은 의미가 컸다. 1939년 이래 비오12세의 보수적인 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는 이탈리아 정치와 사회에 부단히 개입했다. 어마어마하게 중앙집권적인 인물이었던 비오12세는 1944년 루이지 말리오네 추기경의 죽음 이후에는 어떤 대신도 가까이 두지 않았다.

반면에 요한23세의 짧은 재임기간(1958-63년)은 선명하게 대조적이었다. 1909년에 젊은 사제였던 론칼리는 주교인 라디니 테데스키를 본받아 베르가모 직물공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출중한 외교관이었던 그는 한결같이 단순하며 겸손했다. '일 파파 부오노'(멋진 교황)라 불렸던 요한23세는 여러 면에서 확고부동한 전통주의자였고 교황에 선출됐을 당시 이미 77세였다. 그에게 텔레비전은 저주의 대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23세는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를, 교회가 이런 변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리하게 느끼고 있었다. 제2차 공의회에서 그는 "전통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어제 이뤄진 진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룰 진보 역시 내일의 전통을 구성할 겁니다."

이탈리아 정치의 장에서 교회는 중도-좌파 동맹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하지만 1961년 여름에 교회의 역할에 대한 요한23세의 근원적인 재평가가 시작됐다. 그는 자신이 '좌파를 향한 개방'에 동조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입주의적인 정치적 역할을 포기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점차 분명히 했다.생애 마지막 2년 동안 그는 가톨릭교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했다. 1961년 5월 회칙 '어머니와 교사'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집중했다. 회칙은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작동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더 큰 사회정의의 필요를 강조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가 사회.정치 질서에 통합되기를 호소했다. 1962년 10월에 요한23세는 제2차 공의회를 열었다. 


교황 요한23세. www.catholicvote.org



1963년 7월 요한23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최후의 회칙 '지상의 평화'를 공표했다. 이것은 국제적 화해에 대한 감동적인 호소, 교회는 중립을 지키며 냉전 장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근거하고 있었다. 회칙은 가톨릭교도들만이 아니라 "선의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건네는 대화였으며, 노동계급의 사회경제적 발전 증대의 필요, 여성의 공적 생활 진입, 제3세계 반식민 투쟁들의 정의로움을 강조했다.

가톨릭 세계와 마르크스주의 세계 사이에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지역 차원에서, 돈 카밀로와 페포네가 영원히 서로의 몰락을 획책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전국 차원에서는 기민당과 사회당이 드디어 대면하게 된다. (374-377쪽)


볼로냐


1960년대에 공산당의 정책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볼로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한편으로는 지역 기업과 체티메디에게 전반적인 지원금과 편의시설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복지와 저렴하고 효율적인 대중교통을 공급하는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볼로냐의 사회복지 분야는 효율성과 포괄성 면에서 명성을 누렸다. 대중교통은 저렴하고 양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주택공급과 관련해 시 당국은 제한된 가능성들을 운용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1963-68년 로마의 방 가운데에 '피아니 디 에딜리치카 에코노미카 에 포폴라레(경제적인 서민주택)'으로 조성된 방은 7.4%였고 밀라노에서는 15%였던 데 비해 볼로냐에서는 34.7%였다. 

중도-좌파의 목표는 전국적 차원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소속 반대파에 의해 지역적으로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계급 간 동맹과 양호한 노동관계, 그리고 사회복지 지출에 기반을 두는, 라 말파의 인도적이고 온건한 개혁주의의 본거지가 된 곳은 공산당의 볼로냐였던 것이다. (426-427쪽)


1968년과 '극우 반동'


베트남전쟁은 이탈리아인들의 한 세대 전체가 미국에 대해 생각했던 방식을 바꿔 놓았다. 이탈리아의 68에서도 가장 많이 되풀이된 슬로건 중 하나가 '하나,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 창조하라'였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 청년들에게 '진짜 '미국은 다른 모습이었다. 대학가의 반전 시위, 캘리포니아의 코뮌들과 대항문화, 블랙파워 운동이 바로 그런 미국이었다.

동시에 사회주의를 성취하려는 새로운 모델이 1966-67년 시기에 중국의 문화혁명 경험에서 출현한 듯 보였다.러시아의 위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 버전과는 반대로 문화혁명은 이탈리아에서 자생적이고 반권위적인 대중적 저항운동으로 널리 해석됐다. 

마지막으로, 남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학생운동의 제3세계적 영감을 완결했다. 1967년 가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가 죽자,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 학생들에게도 게바라는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되었다. 가톨릭 교리와 마르크스주의의 조화를 추구했던 급진적인 남미 사제들의 가르침이 이탈리아에서는 매우 특별한 반향을 얻었다. 이탈리아 대학가에서 벌어진 최초의 반역들이 강고하게 가톨릭적인 제도들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히 아니었다. (434-435쪽)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학생 운동가들을 보통 '치네시'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로버트 럼리가 언급하듯이 "빨갱이의 위협과 황인종의 위험을 한 단어로 상기시켰다."이탈리아 체티메디는 자기들 한복판에서 분출한 반역에 기겁했다. 아들과 딸이 부모의 권위와 생활방식을 거부함에 따라 가정 안에서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분명히 반자본주의적이었지만 또한 아주 격렬하게 반공산당이기도 했다. 1968년 6월 [공산당의] 조르조 아멘돌라가 운동이 비합리적이며 유아적이라고 공격했을 때 그는 당내에 널리 퍼져 있던 감정을 터뜨렸던 것이다. (442쪽)


긴장 전략


1969년 12월 12일 밀라노의 피아차 폰타나에 있는 반카 나치오날레 델라그리콜투라에서 폭탄이 터져 16명이 죽고 88명이 다쳤다. 이날 로마에서도 같은 유형의 폭탄 두 개가 터져 18명이 다쳤다. 경찰과 내무부는 즉각 무정부주의자들 소행이라고 발표하고 혐의가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찾아 체포하기 시작했다. 

밀라노의 철도원인 무정부주의자 주세페 피넬리는 폭탄 공격이 있던 날 밤에 체포됐고 12월 15일 밀라노 경찰총수의 집무실에서 추락사했다. 공식 해명에 따르면 피넬리의 사인은 자살이었다. 

폭발이 무정부주의자의 소행이라는 경찰 해명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무시해버린 증거가 가리키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아니라 베네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프란코 프레다와 조반니 벤투라가 이끈 네오파시스트 그룹이었다. 벤투라가 긴밀하게 접촉한 귀도 잔네티니는 SID(이탈리아비밀정보국) 소속 대령이었다. 비밀정보국 요원들과 극우 그룹들 사이의 광범위한 접촉이라는 가장 불길한 그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폭발 사고와 잔학행위는 공포와 불확실함을 심어 결국에는 권위주의 정권이 자리잡게 할 전제조건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바로 긴장 전략이었다. 대령들은 그 전략을 그리스에서 성공적으로 전개했으며, 이제는 네오파시스트들과 비밀정보국이 이를 이탈리아에서 재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480-481쪽)


1970년대, 위기와 타협


1973년 가을 이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경험한 경제 위기는 1929년 이후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위기가 대책의 폭을 얼마나 제한했으며, 모든 사회.정치적 세력의 행동 조건을 얼마나 한정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이 복합되다 보니 이탈리아는 영국과 더불어 서구 경제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에너지 자원 빈곤은 석유에 대한 과잉 의존으로 이어졌다. 1973년이 되면 석유가 에너지 수요의 75%를 충당하게 됐는데, 1955년만 해도 33.6%였다. 자본가 계급은 대부분 투자 파업과 자본도피로 산업 불안에 대처했다. 정부는 취약하기로 악명 높았고 노동운동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강했으니 실질임금을 줄여서 비용 증대에 대처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2년과 1973년의 '미니호황', 1974년 후반과 1975년의 심각한 경기후퇴, 1976년의 회복, 1977년의 쇠퇴, 1978년의 미약한 회복이라는 연례적인 등락 밑에는 이탈리의 특유의 네 가지 추세가 놓여 있었으니, 아주 높게 지속된 물가상승률, 지하경제의 성장, 생산의 제한적 쇠퇴, 공공부문의 나선형 적자 등이다. (505-507쪽)


1981년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는 베를링구에르. granma.cu



역사적 타협


1972년 3월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공산당 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시 50세에 불과했던 그는 당 서기로서 거의 톨리아티만큼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당내 위상은 개인숭배에 대한 그의 혐오 때문에 완화되었다.

그는 1973년 10월 '리나시타'에 게재된 유명한 논설에서 공산당, 기민당, 사회당 사이의 '역사적 타협'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군부 쿠데타로 전복됐다. 베를링구에르의 주장은 이탈리아에도 "국민을 둘로 쪼갤 위험 압력"이 있으며 "칠레의 비극적 경험이 재차 입증했듯이 민중 세력이 권력의 기본 지렛대를 장악하기 시작할 때 반동은 더 폭력적이고 격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베를링구에르는 이런 경향들에 맞서고자 1943-47년 반파시즘 세력이 창출했던 것을 닮은 새로운 대연합을 제안했다. 사회적 층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은 노동계급이 체티메디들과 맺는 동맹이었다. 정치적인 층위에서는 기민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베를링구에르의 제안은 공산당을 이탈리아 정치의 중앙무대로 복귀시켰다. 또한 이탈리아 민주주의를 지키고 기민당과 체티메디를 권위주의적 유혹으로부터 격리하는 방어적 의도를 실현시켰다. 190년대 이탈리아 위기의 폭발성을 감안한다면 이 성취는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511-513쪽)


1980년대


이탈리아의 놀라운 경제 회복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공기업 부문의 반전이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IRI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심한 위기에 빠진 그룹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 중반의 유리한 경제 조건과 볼로냐 대학 교수 출신인 로마노 프로디의 역동적 경영이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82년 10월에 임명된 프로디는 논란이 많았던 민영화와 더불어 급진적인 구조조정 및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몇 안 되는 인사들로 한정됐던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명망가 집단에 새로운 인물들이 충원됐고 이들의 영향력 역시 강화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화학비료 그룹들 중 하나의 대표인 라울 가르디니, 올리베티에서 권력 기반을 쌓기 시작한 카를로 데 베네데티, 거대 미디어 제국을 거느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의류업의 명망가 루차노 베네통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모두 자신들의 자산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데 매우 헌시적이었고, 유럽 금융계에서 이탈리아 '콘도티에리(용병 대장들)'의 새 시대 운운하는 말들이 나왔다. (590쪽)


정치적으로도 변주가 목도됐다. 저명한 반파시스트 사회당원 산드로 페르티니가 1978년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절묘한 선택임이 입증됐다. 이 왜소하고 허약한 노인이 대통령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거침없이 옹호하고 자신의 반파시스트 청년기를 일관되게 거듭 상기시키며 매년 수천 명의 초등학생을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으로 초청하던 모습은 여론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페르티니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었다. 단명했던 파리 정부 이후 35년 만에 레지스탕스가 국가 최고위직에 복귀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이탈리아 민주주의는 훨씬 강해졌다. 

1983년의 총선은 기민당에 파국적인 결과를 안겨주었고 베티노 크락시가 최초의 사회당 출신 내각회의 의장이 되는 길이 열렸다. 크락시의 재임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져서, 1983년에서 1987년까지였다. 개성과 전술적인 노련함, 타고난 정치적 수완 덕분에 그에게 적은 별로 없었고 추종자가 많았다. (605쪽)


산드로 페르티니. thevision.com



그렇지만 기민당-사회당의 동맹은 상호 신뢰와 동등함에 근거한 정치동맹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구심과 경쟁심과 자리다툼으로 갈라져 있었다. 어떤 전략적 계획도 거의 수립할 수 없으며,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고, 반드시 강한 정부보다 약한 정부로 귀결되고야 마는 그런 동맹이었다. 

그 결과로 1980년대의 개혁주의는 일관성이 없었다. 크락시는 나라보다는 자기 당을 위한 전략가였고 1968-78년 존재했던 사회운동의 압력이 부재한 가운데 개혁 실적은 보잘것없었다. (606쪽)


공산당에 1980년대는 암울한 10년이었다. 1984년 베를링구에르의 급사는 공산당에게서 1980년대의 부진을 뚫고 자신들을 이끌 만한 정치적 유능함과 국제적 지위를 갖춘 인간을 앗아갔다. 그의 장례식 때 로마 거리에는 1백만 명도 넘는 이들이 나와 이례적인 시위를 벌였으니, 이것이 이탈리아공산당이 전국적 무대 중앙을 차지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608쪽)



[구정은의 ‘수상한 GPS’]아마존이 기름 부은 글로벌 ‘당일배송’ 전쟁...택배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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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배송, 당일배송, 자정 전 주문하면 새벽 배송. 유통과 소비의 흐름이 빨라지고 삶의 속도도 빨라진다. 물류에 휩싸인 사람들의 노동은 힘들어진다. 전 세계가 ‘당일배송’의 영향권 아래에 드는 날도 곧 올까. 
 

아마존이 글로벌 ‘당일배송’에 시동을 걸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미국 아마존은 지난 26일(현지시간) ‘24시간 내 배송’ 서비스를 늘리기 위해 올 2분기에만 8억달러(약 9300억원)를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동안 ‘프라임 고객’들에게 주문 뒤 48시간 내 무료 배송을 해왔는데, 배송시간을 절반인 24시간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당장은 프라임 회원에 한해 서비스하겠다고 했지만 프라임 회원 숫자만 이미 1억명이다. 아마존은 지난달 ‘35달러 이상 구매고객’으로 프라임 회원 가입의 문턱을 낮췄다. 

 

“더 빠르게, 우리의 목표”
 

아마존 최고재무책임자(CFO) 브라이언 올사브스키는 “(2분기에) 배송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자는 주로 북미 지역에서 이뤄지겠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도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아마존은 올해 1분기 순익이 35억6000만달러를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로 늘어났다고 발표하면서 24시간 무료배송 계획을 함께 공개했다. 그날 아마존 주가는 올라갔고, 월마트나 타깃 등 미국 시장에서 경쟁을 벌여온 다른 유통업체들 주가는 떨어졌다. 아마존은 이미 세계 50여개 도시에서 24시간 내 배송, 혹은 당일배송을 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선 프라임나우라는 이름으로 ‘2시간 내 배송’ 서비스까지 한다.

 

FILE PHOTO: Amazon boxes are seen stacked for delivery in the Manhattan borough of New York City, January 29, 2016. REUTERS/Mike Segar


 

올초만 해도 아마존의 실적이 별볼일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회사 측에서 영업비용이 크게 늘어난 것 같다는 추산치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가 외국기업 투자 규제를 강화하면서 아마존이 인도 시장에서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1분기 순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16억달러에서 2배로 뛰었다. 올사브스키 CFO는 “우리가 인건비 부담 등을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고 했다. 
 

아마존에 따르면 배송에 들어간 비용은 올 1분기에 전체 비용의 21%였다. 2017년과 2018년만 해도 30%가 넘었는데 배송비용 비중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아마존은 줄어든 부담만큼 배송서비스에 투자를 할 계획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경쟁 업체들에게도 (배송시간을 줄이라는) 압박이 심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가 간 주문에서도 배송시간은 점점 빨라질 수밖에 없다.
 

1998년 미국의 코즈모닷컴이라는 업체가 몇몇 도시 지역에서 ‘1시간 내 배송’이라는 택배서비스를 선보였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3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소매업체들의 경쟁은 상품경쟁이 아닌 ‘배송 전쟁’이 됐다. 아마존을 필두로 미국 UPS의 메트로포스트 서비스, 구글 익스프레스, 아마존 프라임 같은 배송서비스들이 자리를 잡았다. 글로벌 기업들이 우버나 지역 소매업체, 스타트업 회사들과 손잡으면서 상품이 배달되는 속도는 급속히 빨라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어맨’ 같은 스타트업이, 시카고에서는 ‘위딜리버’라는 회사가 앱으로 주문받은 물건을 1~2시간 안에 고객의 집앞에 가져다놓는다.

 

속도전 불붙은 아시아

리서치인사이츠라는 컨설팅업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미 지역에서 2억명 이상이 지난해 온라인쇼핑으로 물건을 배달받았다. 이 지역 온라인상거래 규모는 3500억달러 규모였는데, 특히 당일배송 시장은 전년 대비 3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아마존은 미국 시장에서 배달하는 물건의 20~25% 정도를 당일배송으로 처리한다. 애드로이트마켓리서치의 2018년 9월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온라인 상거래 시장은 2조달러 규모였으며, 당일배송 시장은 인터넷·스마트폰 사용자가 늘면서 급속히 커지고 있다. 보고서는 2017년 소비자들에게 간 물건의 51%가 당일 배달된 것으로 추산했다. 
 

세계 배송시장은 A-1익스프레스, DHL그룹, UPS 같은 회사들이 주도하고 있으나 아마존, 알리바바, 이베이, 라쿠텐, 잘란도, 그루폰 등 소매업체들도 나서서 배송 속도 경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아시아의 속도전이 특히 눈에 띈다. 보고서는 세계 당일배송 소매 거래의 36%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했다. 쿠팡, 마켓컬리 같은 배송업체들이 생긴 뒤 국내에선 ‘새벽배송’이 장보기를 대체하고 있다. 2015년 100억원대였던 한국의 새벽배송 시장 규모가 2018년 4000억원대로 커졌다는 닐슨코리아 분석도 있다.
 

아마존은 배송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미 택배코드 개편 등 밑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시장분석가 안드리아 쳉은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실은 글에서 “아마존이 원데이 쉬핑(one-day shipping·당일 선적)을 새로운 업계 기준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고 썼다. 속도를 내세운 아마존의 전략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없지는 않다. 월마트를 비롯한 오프라인 공룡들이 아마존을 따라잡으려 분투하고 있지만, 수익성 낮은 소매시장에서 성장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어차피 아마존의 주력 사업분야는 데이터 판매와 광고부문 등이고, 배송속도를 높이는 것은 일단 시장점유율을 높여놓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동조건이 나빠지는 걸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마존의 이번 배송시간 단축 발표가 나온 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기즈모도는 “아마존의 계획은 노동자들에겐 지옥”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아마존과 계약한 배달업체 직원들은 이미 이전부터 추가수당 없이 연장근무를 하고 있고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존이 속도 드라이브를 걸면 그 부담을 결국 이들이 덮어쓰게 되리라는 것이다. 

 

무인배송, ‘택배의 미래’?
 

‘노동자’일 때와 ‘소비자’일 때, 사람들의 관점은 180도로 바뀐다. 컨설팅회사 매킨지가 2016년 미국, 중국, 독일의 소비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해 분석한 ‘택배, 최종 배송지의 미래’라는 보고서가 있다. 조사 결과 배송의 관건은 역시나 속도였다. 특히 중국의 소비자들 중 30% 이상이 배달 속도를 우선순위에 놓았다. 그런데 응답자의 국적에 상관없이 ‘속도’에 추가비용을 내겠다는 비중은 적었다. 더 빨리 물건을 받고 싶지만, 돈을 더 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 응답자들의 절반 가량이 추가요금을 낼 수 있다고 했지만 이들이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말한 비용은 1달러가 못 됐다. 더 빨리 배달해야만 하는 업체들로서는 다른 부분에서의 ‘착취’를 피할 수 없는 구조다. 

 

매킨지가 예상한 택배의 미래 (자료: 2016년 ‘택배, 최종 배송지의 미래’ 보고서)


 

혼잡한 도심에서 내 집 문앞까지, 저렴하게 혹은 공짜로 물건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비용을 낮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보고서는 결국 자동화된 운송수단을 이용한 배달이 늘어날 것으로 봤다. 자율주행차를 이용해 운전 인력을 줄이는 중간 단계를 거친 뒤에 ‘사람 없는 택배’가 현실화될 수 있다. 사물함이 달린 자율주행차(AGVs)를 이용해 물건을 가져다놓는 ‘AGVs-로커’ 모델이나 드론 택배가 앞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매킨지는 드론 택배가 2025년 미국에서만 25만건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자율주행차나 드론 택배는 심야와 휴일 배달도 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조건 이슈를 비껴갈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들었다. 택배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새벽배송이 이미 자리잡은 한국과는 한국과는 상관 없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드론 배달은 화물 크기가 제한돼 있고, 무엇보다 드론에 대한 각국 정부의 규제와 직접 관련돼 있으니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크라우드소싱 배달’이라는 아이디어도 눈길을 끈다. 누군가가 물건을 가져다주길 원하면, 그 순간 그 곳에 다녀갈 수 있는 사람이 앱을 통해 요청을 받고 택배원이 돼주는 일종의 ‘공유배달’이다.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하면 ‘드로이드’라 불리는 소형 무인카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배송을 해줄 지도 모른다.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는 것은 사람들이 ‘빨리빨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사람의 속도는 뒤쳐지고 사람의 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기술발전과 욕망의 역설이다.

[기협 칼럼] 기자의 윤리, 기자의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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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윤리의식 혹은 도덕성이 필요할까. 윤리의식의 절대적인 양을 측정할 수는 없으니 질문을 좀 다듬어보자. 기자에게는 ‘보통 사람들’ ‘독자들’보다 더 높은 윤리의식이나 도덕성이 필요할까. 
기자의 윤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보편적인 윤리의식이 있는가 하면, 취재와 보도를 하면서 지켜야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윤리가 있다. 둘은 분리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일 수도 있다. 기자들이 취재나 보도를 하면서 금품을 받아선 안 되고, ‘취재 편의’라는 명목으로 합당하지 않은 대우를 요구하거나 받아서도 안 된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보도를 해서도 안 된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해서도 안 되고, 특정 사실을 부풀리거나 왜곡해서도 안 된다. 이론적으로 기자들이라면 이쯤은 안다.
보도와 직접 관련돼 있지 않은 사적인 영역에서라면? 사적인 영역에서 기자들은 시민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것보다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까? 기자가 보도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증오심과 혐오감을 부추기면 안 된다. 그렇다면 기자들은 개인으로서도 그런 발언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성폭행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기자 동료 혹은 기자 아닌 친구들에게 전달하고, 성범죄 동영상을 ‘사적으로’ ‘비공개로’ 끼리끼리 돌려보는 행위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혐오발언이나 사실이 아닌 일을 퍼뜨려 문제가 된 것은 한두 건이 아니다. 김영란법을 계기로 기자들의 행태가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번엔 단톡방 사건이 터졌다. 불법 동영상을 기자들끼리 돌려보다가 걸렸다. 이 사건은 성범죄에 대한 기자들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언론이 지탄해온 짓들을 언론인들이 해왔다는 걸 보여줬다.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은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언론의 권리와 기자들의 책무라는 두 축으로 구성돼 있다. 언론자유 수호, 공정보도, 품위유지, 정당한 정보수집, 올바른 정보사용, 사생활 보호, 취재원 보호, 오보의 정정, 갈등·차별 조장 금지, 광고·판매활동의 제한. 하지만 지금 시민들 눈에 비치는 기자들 모습은 ‘더 높은 윤리의 소유자’이기는커녕 범죄자에 가깝다. 헌법으로 보호받는 ‘언론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윤리의식은 없다.
“기자라면 이러저러해야지”라고 말하면 아마도 상당수의 후배 기자들은 “예전엔 더 나쁘지 않았느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기자들이 기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되라고 강요할 명분이나 명쾌한 기준도 없다. 그러나 기자의 윤리를 떠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도 해서는 안 될 짓들을 해서야.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불법행위이고 범죄다. ‘수사 촉구’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온 것을 보니 창피하고 화가 치민다. 기자와 윤리의 당연하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고민하는 것조차 아깝게 느껴지지만, 그럴수록 고삐를 죄지 않으면 기자가 사회의 악이 된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카타르 기지의 미군 폭격기, 이란으로 날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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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 알우데이드. 카타르 남동쪽, 걸프(페르시아만)의 바닷물이 내륙을 비집고 들어온 좁은 해협이다. 카타르 정부가 개발을 막고 있는 이 지역에선 물길 사이로 파도가 일고 철새들이 오간다. 바닷가에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주변엔 사막이 펼쳐져 있고 듄들이 솟아 있다.

 

북쪽 내륙에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있다. 지난 9일 그곳에 미군 B52 전폭기가 착륙했다. ‘이란의 위협’에 대비해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군사작전을 담당하는 미군 중부사령부가 전폭기를 보냈고, 한동안 철수시켰던 패트리어트 시스템도 다시 배치하는 중이다. 이웃 아랍국들과 다투고 이란과는 미묘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카타르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세 속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지난 9일 카타르 내륙 사막에 있는 알우데이드 공군기지에 미군 B-52H 전폭기가 착륙해 있다. 백악관은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걸프를 보호하기 위해 전폭기를 배치했다고 밝혔다. 미 공군·AP연합뉴스

 

그 핵심에 알우데이드 공군기지가 있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경우, 이곳이 미군의 전략사령부이자 병참기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걸프전이 낳은 사막의 기지

 

수도 도하에서 30km, 사막 가운데에 있는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는 카타르 영토이지만 카타르만의 것이 아니다. 인구 260만명 중 자국민은 11%에 그치고 나머지는 모두 ‘체류 외국인’인 카타르는 병력이 1만1800명에 불과하다. 카타르 공군 사령부가 알우데이드에 있지만 사실상 기지의 주인은 미군이다.

 

기지가 생긴 계기는 1991년 미국과 아랍국들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걸프전이다. 인구가 적고 군사력이 거의 없는 카타르는 미국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탈냉전 이후 안보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기지를 짓기 시작했다. 전략컨설팅회사 글로벌시큐리티의 분석에 따르면 카타르의 전략은 ‘일단 기지를 지으면 미군이 온다’는 것이었고, 1996년 10억달러를 들여 알우데이드 공군기지를 만들었다. 기지를 짓는 것도 미군 공병부대가 했으니, 건설비는 거의 미군 계좌로 들어간 셈이다. 3년 뒤 당시 카타르 국왕이던 셰이크 하마드가 미국에 1만명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예상대로 미군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기지는 국내 반발 때문에 골칫거리가 돼가던 차였다.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가 2001년 9·11 테러를 계획하게 된 배경 중의 하나도 사우디 내 미군기지에 대한 반감이었다. 실제로 미군기지와 미군 함정을 겨냥한 테러도 벌어졌다. 사우디에서의 미군 작전 자체에도 한계가 있었다. 사우디와의 군사협정은 미군이 ‘사우디 내 안보’를 위해서만 활동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미군도 2003년까지는 모두 철수했다. 반면 카타르와 미국이 1999년 맺은 군사협력협정에는 활동영역 제한이 없었다. 미군이 알우데이드의 무기와 병력을 가지고 카타르 밖에서도 군사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후 알우데이드는 중동 최대의 미군기지가 됐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3년 이라크 공격 때 알우데이드에서 전투기들이 날아올랐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영국 공군도 이 기지의 토네이도GR4 전투기들을 가지고 ‘헤릭 작전(아프가니스탄)’과 ‘텔릭 작전(이라크)’을 벌였다. 호주군의 F/A-18 호넷 전투기와 허큘리스 수송기도 알우데이드를 기지로 썼다. 영국의 주력 전투기들은 2009년 모두 철수했지만 여전히 영국 공군은 알우데이드의 시설을 쓰고 있다. 2016년 이후로는 이슬람국가(IS)와의 싸움에 다시 이 기지가 동원됐다. 지난해 시리아에 미사일을 퍼부은 미군 B-1B 폭격기도 알우데이드에서 출발했다.

 

현재 걸프에 주둔 중인 미군은 약 4만명이다. 미군 제5함대가 있는 바레인과 쿠웨이트에 약 2만8000명, 카타르에 1만~1만1000명이 있다. 이밖에 일부가 이라크 등에 주둔하고 있다. 바레인·쿠웨이트·카타르 세 왕국은 연간 6억5000만달러에 이르는 미군 주둔비용의 약 60%를 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타르 군대의 주요 무기는 80% 가까이가 프랑스제였지만 알우데이드의 성장과 함께 미국산 무기 비중이 늘었다. 카타르는 군사력을 현대화한다며 MIM-104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만 120억달러를 썼다. 알우데이드를 운영하는 것은 오만 공군과 전쟁물자비축(WRM) 계약을 맺은 미국 민간군사회사 다인코프다.

 

아랍 갈등과 카타르의 줄타기

 

3750m 길이 활주로를 갖춘 사막 가운데 공군기지는 비밀리에 운영됐다. 기지의 존재가 ‘공식화’된 것은 2002년 3월이다. 딕 체니 당시 미국 부통령이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기지를 방문했다. 1년 뒤 미국은 바그다드 공습을 시작했고, 사우디의 프린스술탄 공군기지에 있던 중부사령부 공군작전센터가 알우데이드로 옮겨왔다. 알우데이드는 임대료가 없다. 미군은 이 기지를 공짜로 쓴다. 설비를 고치고 늘리는 비용도 카타르가 낸다.

 

2017년 6월 사우디와 카타르의 갈등에 불이 붙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이 영공을 닫고 ‘카타르 보이콧’을 선언했다. 당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카타르를 압박할 지렛대로 삼은 것이 알우데이드 기지였다. 그해 7월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사우디 편을 들면서 알우데이드의 미군을 빼낼 수 있다고 을러댔다. 트럼프는 “우리가 (카타르를) 떠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돈까지 내주면서 우리를 부르는 나라가 10곳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카타르가 미군의 우산을 필요로 하듯, 미군도 카타르가 필요하다. 군사전문지 밀리터리타임스는 미국이 앤서니 지니 전 중부사령관을 특사로 보내 카타르 측에 ‘중동 전략에는 변화가 없음을’ 알렸다고 보도했다. 미군은 알우데이드를 떠나기는커녕 시설을 늘리라고 요구했고, 지난해 1월 카타르 정부는 미군 주거시설 200채를 더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양국의 협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할리드 알아티야 카타르 국방장관은 렉스 틸러슨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 국방장관 등과 만난 뒤 알우데이드를 미군의 ‘영구적인 기지’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이 공중촬영한 카타르의 알우데이드 공군기지. 사진 미 공군

 

올 1월에는 미 국방부와 카타르가 알우데이드를 확장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도하에서 전략대화를 가진 마이클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셰이크 모하메드 알타니 카타르 부총리 겸 외무장관은 “역내 안정과 양국의 군사적 파트너십”을 재확인했다고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알우데이드는 미국 안보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양해각서는 미국과 카타르의 갈등이 봉합됐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여전히 카타르와 아랍국들과 껄끄러운 사이다. 막대한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미래 국가’를 만들려 하는 카타르는 산유량 한계에 부딪친 사우디나 오만 같은 이웃 군주국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을 늘 손가락질하지만, 미국 전문가들도 부인하지 못하는 중동 정치·경제·사회의 최대 위험요인은 낙후된 전제왕정국가 사우디다. 카타르의 ‘젊은 왕실’은 아랍 형제들뿐 아니라 역내 모든 파트너들과 적당한 관계를 맺으면서 생존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줄타기 외교를 해왔다.

 

소국 카타르 입장에선 특히 바다 건너 이란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카타르와 이란은 세계 최대 천연가스전을 공동소유하고 있다. 면적 9만7000㎢, 걸프의 거대한 천연가스전 가운데 노스필드는 카타르가, 사우스파르스는 이란이 개발한다. 이 가스전 때문에라도 두 나라는 관계를 끊을 수 없다. 카타르는 기술력이 떨어지는 이란의 천연가스 추출을 돕고 있으며, 이란을 맹비난하는 아랍의 ‘험한 입’에 동참한 적이 없다. 카타르와 갈등이 극심했을 때 아랍국들은 카타르 정부가 이란 혁명수비대에 돈을 댄다고 비난했다. 이란은 아랍국들의 카타르 보이콧을 비판하면서 “대화로 풀라”며 도하의 우방 편을 들었다.

 

호르무즈 위기가 폭발하면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기지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란 혁명과 옛소련의 아프간 점령 뒤부터다. 1980년 1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카터 독트린’을 계기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알우데이드는 걸프전을 계기로 만들어졌지만 애당초 이 기지가 겨냥한 것은 이란이었다. 2000년 4월 윌리엄 코언 당시 미 국방장관은 카타르를 방문해 알우데이드의 기능을 논의하면서 ‘미군 항공모함이 걸프에 있지 않을 때 군사적 위기가 벌어지면’ 육상에서 당장 전투기가 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미국이 당시 상정한 위협은 이란이었다.

 

걸프에서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을 가리켜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체크포인트”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바다를 통해 옮겨지는 원유의 3분의1이 이곳을 통과한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래로 호르무즈는 미국과 이란 간 대치의 무대가 돼왔다.

 

2017년 3월 걸프와 아라비아해를 잇는 호르무즈 해협 부근에서 미군 조지HW부시 항공모함 주변에 이란 혁명수비대 함정이 접근하고 있다. 미 해군 헬기들이 상공을 날며 이란 함정을 감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동안 잠잠했던 호르무즈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 뒤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 미국은 이란이 긴장을 높이는 도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군사력을 확대하고 있고, 이란도 지난 3월 해상훈련 등 무력시위를 늘렸다. 지난 4월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국제적인 수로관리 규칙을 (미국이) 부정한다면 해협을 닫겠다”고 했다. 아미르 하타미 이란 국방장관,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양국 고위 인사들의 설전이 벌어졌다. 미군 항공모함이 걸프에 배치되더니 전투기들이 알우데이드로 날아갔다.

 

호르무즈에서 실제 충돌이 벌어진 것은 이란-이라크전 때였다. 1988년 4월 미군 프리깃함이 이란 어뢰에 부서지자 미군이 이란 함정들을 침몰시켰다. 그 뒤로 물리적 충돌은 거의 없었다. 2016년 1월 미 해군 함정이 이란 영해의 파르시 섬에 접근했다가 미군 10명이 억류됐다. 그때만 해도 관계가 좋았기에 존 케리 당시 미 국방장관과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이 긴급대화에 나섰고 미군들은 하루만에 석방됐다.

 

다시 두 나라가 부딪친다 해도 극히 제한된 군사행동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싱크탱크인 크라이시스그룹은 군사전문가를 인용해 “이란의 해군력은 미국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므로 ‘바다에서의 게릴라전’처럼 벌어질 것”이라고 봤다. 미국도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으며, 항모 배치 등을 통해서 동맹국들에게 ‘에너지 흐름과 역내 안전을 보장할 의지와 힘이 있음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카타르 등 곳곳에서 대리전을 벌여온 미국과 이란이 직접 부딪친다면 역내에 미칠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몇년 전만 해도 케리-자리프 대화와 같은 고위급 채널이 열려 있었고 양국 간에 핵협상을 하면서 쌓아온 신뢰가 있었지만 트럼프 집권 뒤 모두 무너졌다.

 

<기지국가>를 쓴 미국 학자 데이비드 바인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장래에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군 기지를 세우는 것은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시킬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라고 말한다. 기지가 오히려 우려했던 그 위협을 불러올 것이라는 경고는 알우데이드에도 적용된다.

 

항모와 전투기로 위협하는 미국, 내부에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카타르. 폭격기들이 알우데이드에서 이란을 향해 날아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중동은 또 어떤 아수라장이 될까.


[구정은의 ‘수상한 GPS’]‘이란 지킴이’ 중국으로 향하는 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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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배의 이름은 ‘구마노가와’였다. 일본에서 만들어져 세계의 대양을 돌아다녔다. 길이 330m에 폭 60m, 최대 30만2200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거대한 유조선은 이후로 두 차례 소속 회사와 국적이 바뀌었으며 이름도 그때마다 달라졌다. 지금은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 선적(船籍)을 둔 ‘퍼시픽브라보’ 호다. 

 

대형 유조선 ‘퍼시픽브라보’호는 미국이 이란 제재를 강화한 뒤인 지난 17일 이란산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걸프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사진 마린트래픽닷컴

 

2001년 도쿄 서쪽 가와사키에서 제작된 배는 ‘갤럭시 나비에라 마리타임’이라는 회사에 팔렸다. 파나마에 사무실을 둔 회사의 소유였지만 선적은 라이베리아였다. 2017년 11월 구마노가와의 국적은 태평양의 섬나라 마셜제도로 바뀌었고 이름은 ‘실버글로리’가 됐다. 

 

이란 기름 싣고 중국으로

민간 상선은 소유주의 국적과 상관 없이 원하는 나라에 선적을 두는 ‘편의치적(FOC)’이라는 관행이 있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 항만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으로 노동관련 규제가 늘자, 규제가 덜한 나라에 선적을 두는 관습이 생겼다. 돈 없는 나라들은 이런 상선들을 등록해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영국의 정보회사 IHS마킷에 따르면 2017년 3월 현재 세계 대형 상선들 중 8052척은 파나마에, 3574척은 싱가포르에, 3277척은 라이베리아에, 3244척은 마셜제도에 선적을 두고 있다. 
 

라이베리아에서 마셜제도로 소속이 바뀐 퍼시픽브라보는 FOC 관행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유럽 등에서는 이런 관행 때문에 각국 정부가 법을 집행할 수 없다며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세금이나 규제를 피하려는 기업 이익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뭘 나르고 있는지, 누구 배인지 숨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FOC는 좋은 가림막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이 지난 17일 베이징에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과 회담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이징 신화연합뉴스


2019년 2월, 실버글로리의 이름은 퍼시픽브라보로 또 한번 바뀌었다. 선적은 라이베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거대 유조선이나 화물선의 경로를 추적하는 베슬트래커닷컴에 따르면 배는 지난 3월 말 말레이시아 근방 말라카해협에 들어섰고, 4월 내내 말레이시아의 관문인 클랑 근방에 머물다가 이달 9일 호르무즈 해협에 들어섰다. 걸프(페르시아만)에서 오만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이자 원유가 오가는 핵심적인 길목이 호르무즈 해협이다. 
 

배의 ‘공식’ 목적지는 인도네시아로 돼 있지만 이란 경제 전문매체인 부어스앤드바자르는 최종 기착지가 중국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무역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은 미국이 적대시하는 이란의 원유를 사들이고 있다. 원유를 중국으로 실어나르는 것이 퍼시픽브라보호 같은 배들이다. 퍼시픽브라보가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호르무즈를 떠난 것은 지난 17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이 베이징에서 회동한 날이었다. 
 

미국은 한시적으로 6개월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이 이란산 원유를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줬다가 이달 2일부터 ‘유예’를 끝냈다. 퍼시픽브라보는 미국이 제재를 강화한 뒤 이란산 원유를 싣고 중국으로 간 첫 대형유조선이다. 이달 중순 마샬Z라는 유조선이 이란 석유 13만 배럴을 중국 항구에 하역했지만 제재 강화 전에 실은 것이었고 분량도 적었다.

석유대금 오가는 쿤룬은행
 

부어스앤드바자르에 따르면 퍼시픽브라보의 실소유주는 중국의 쿤룬(崑崙)은행이다. 쿤룬은행은 중국 국영석유회사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의 자회사다. 쿤룬은행은 2006년 중국 내 석유생산 기지가 있는 신장위구르에서 창립됐다. 2009년 CNPC가 지분 77%를 사들여 대주주가 됐다. 2010년 이후로는 중국과 이란 석유거래 대금이 오가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루퉁(이란통)이라는 선박도 갖고 있는데, 이란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와 거래한다는 의혹을 받은 적 있다. 2012년에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이 은행이 이란과의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밝히자 이란이 바짝 긴장했다.
 

이란이 카타르와 공동개발하고 있는 걸프의 사우스파스 가스전. 중국은 2004년 이란으로부터 세계최대의 천연가스전인 이곳의 채굴권을 얻어냈다. 사진 게티이미지


하지만 퍼시픽브라보가 오가는 것에서 보이듯 중국과 이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원유 200만 배럴을 싣고 가는 퍼시픽브라보는 중국이 미국의 이란 제재에 협력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의 압박에 맞서 중국과 이란이 더욱 밀착할 것임을 보여주는 신호다. 왕이 외교부장은 자리프 장관과 만난 뒤 “중국은 미국의 일방 제재에 결연히 반대하고, 이란이 정당한 권익을 지키는 것을 지지한다”고 했고, 트럼프 정부가 깨뜨린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굳건히 지킬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란도 중국의 육상·해상 무역로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화답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를 보면 중국은 2017년 말 기준으로 하루 평균 1322만배럴의 석유를 썼다. 중국의 석유 수입선은 다변화돼 있고 이란의 비중은 아직 그렇게 크지 않다. 지난해 중국이 수입한 원유의 15.8%는 러시아산이었고 12.4%는 사우디, 10.4%는 앙골라, 9.4%는 이라크에서 왔다. 이란산 비중은 2011년 10%에 육박했으나 작년에는 6.3%에 그쳤다. 제재 탓이다. 이란의 원유 수출량은 지난 3월 하루 140만~165만배럴이다가 4월엔 102만~130만배럴로 감소했다. 이달엔 20만~60만배럴 선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내다봤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이란은 미국의 제재를 빌미로 끊어낼 수 없는 존재다. 당장의 원유보다 중요한 것은 이란 내 에너지 채굴권이다. CNPC만 해도 이란 내 19개 천연가스전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두 나라는 계속 관계를 강화했다. 2004년 이란의 사우스파스 가스전에서 중국이 30년간 천연가스를 채굴할 수 있도록 한 계약이 체결됐다. 2007년에는 CNPC가 이란 북부 아바즈 유전 채굴권을 36억달러에 사들였다. 중국은 이란 남부와 카스피해를 잇는 송유관·가스관 사업에도 투자했다. 시노펙(중국석유화공)과 이란LNG는 같은 해 1000억달러 규모의 천연가스 공급계약을 맺었다. 2009년에는 이란 서부 북아자데간 유전을 공동 개발하기로 두 나라가 합의했다.

 


“3차대전 일어나도 지킨다”
 

중국과 이란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2011년의 포괄적·배타적 협력협정이었다. 이란은 중국이 몇몇 유전과 가스전을 독점 개발할 수 있게 해줬다. 이 협정에 따라 중국 기업들은 이란의 특정 지역에서 탐사·시추·채굴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한 인프라를 마음대로 지을 권리까지 가졌다. 이 지역들에 드나드는 이란인들은 중국 측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중국은 시설 보안을 위해 병력까지 주둔시킬 수 있다. 
 

그 대가로 이란이 얻은 것은 ‘안전보장’이다. 중국은 이란이 외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자국이 공격받은 것과 똑같이’ 대응해주기로 약속했다. 프레스TV 등 이란 언론들에 따르면 당시 중국 해군소장 장자오중(張召忠)은 “중국의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이란을 보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중국과 이란의 연간 교역량은 그리 많지 않다. 2015년에 51억달러였다가 이듬해엔 31억달러 규모로 줄었다. 미국이 인상을 찌푸리면 중국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제재에 협력하는 시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해관계는 전략적이다. 미국기업연구소(AE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해외 투자·건설계약은 전년대비 1000억달러 줄었는데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만은 늘었다. 이 지역 국가들과 중국은 지난해 281억달러 규모의 계약을 새로 체결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야심찬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이란은 핵심 지역 중 하나다. 에너지 외에도 중국이 이란에 걸어놓은 판돈은 또 있다. 이란은 250억달러 이상을 들여 노후 철로 1만km를 2025년까지 새로 깔기로 했고 중국이 고속철도 건설을 맡았다. 계획대로라면 신장위구르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을 지나는 유라시아 철도가 이란까지 이어질 것이다. 중국의 걱정거리인 철강 잉여분도 이 공사에 흡수될 것이다. 이란은 중국의 차관을 들여와 중국 철강을 사고, 중국 기업들에 공사를 맡긴다. 2016년 중-이란 철로가 이어져 중국산 컨테이너가 테헤란 중앙역에 도착하자 양국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했다.
 

2012년 미국이 제재를 강화했을 때 이란은 중국을 잡기 위해 발벗고 나섰고, 실제로 제재가 두 나라 관계를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부어스앤드바자르는 분석했다. 이란과 거래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중국 화웨이의 경영자를 체포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베이징과 테헤란은 곡절 속에서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퍼시픽브라보는 원유뿐 아니라 중국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를 재확인시켜주는 신호까지 싣고 가는 셈이다.

세계의 나라들과 수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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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fghanistan: Kabul
  • Albania: Tirana
  • Algeria: Algiers
  • Andorra: Andorra la Vella
  • Angola: Luanda
  • Antigua and Barbuda: Saint John's
  • Argentina: Buenos Aires
  • Armenia: Yerevan
  • Australia: Canberra
  • Austria: Vienna
  • Azerbaijan: Baku
  • The Bahamas: Nassau
  • Bahrain: Manama
  • Bangladesh: Dhaka
  • Barbados: Bridgetown
  • Belarus: Minsk
  • Belgium: Brussels
  • Belize: Belmopan
  • Benin: Porto-Novo
  • Bhutan: Thimphu
  • Bolivia: La Paz (administrative); Sucre (judicial)
  • Bosnia and Herzegovina: Sarajevo
  • Botswana: Gaborone
  • Brazil: Brasilia
  • Brunei: Bandar Seri Begawan
  • Bulgaria: Sofia
  • Burkina Faso: Ouagadougou
  • Burundi: Gitega (changed from Bujumbura in December 2018)
  • Cambodia: Phnom Penh
  • Cameroon: Yaounde
  • Canada: Ottawa
  • Cape Verde: Praia
  • Central African Republic: Bangui
  • Chad: N'Djamena
  • Chile: Santiago
  • China: Beijing
  • Colombia: Bogota
  • Comoros: Moroni
  • Congo, Republic of the: Brazzaville
  • Congo, Democratic Republic of the: Kinshasa
  • Costa Rica: San Jose
  • Cote d'Ivoire: Yamoussoukro (official); Abidjan (de facto)
  • Croatia: Zagreb
  • Cuba: Havana
  • Cyprus: Nicosia
  • Czech Republic: Prague
  • Denmark: Copenhagen
  • Djibouti: Djibouti
  • Dominica: Roseau
  • Dominican Republic: Santo Domingo
  • East Timor (Timor-Leste): Dili
  • Ecuador: Quito
  • Egypt: Cairo
  • El Salvador: San Salvador
  • Equatorial Guinea: Malabo
  • Eritrea: Asmara
  • Estonia: Tallinn
  • Ethiopia: Addis Ababa
  • Fiji: Suva
  • Finland: Helsinki
  • France: Paris
  • Gabon: Libreville
  • The Gambia: Banjul
  • Georgia: Tbilisi
  • Germany: Berlin
  • Ghana: Accra
  • Greece: Athens
  • Grenada: Saint George's
  • Guatemala: Guatemala City
  • Guinea: Conakry
  • Guinea-Bissau: Bissau
  • Guyana: Georgetown
  • Haiti: Port-au-Prince
  • Honduras: Tegucigalpa
  • Hungary: Budapest
  • Iceland: Reykjavik
  • India: New Delhi
  • Indonesia: Jakarta
  • Iran: Tehran
  • Iraq: Baghdad
  • Ireland: Dublin
  • Israel: Jerusalem*
  • Italy: Rome
  • Jamaica: Kingston
  • Japan: Tokyo
  • Jordan: Amman
  • Kazakhstan: Astana
  • Kenya: Nairobi
  • Kiribati: Tarawa Atoll
  • Korea, North: Pyongyang
  • Korea, South: Seoul
  • Kosovo: Pristina
  • Kuwait: Kuwait City
  • Kyrgyzstan: Bishkek
  • Laos: Vientiane
  • Latvia: Riga
  • Lebanon: Beirut
  • Lesotho: Maseru
  • Liberia: Monrovia
  • Libya: Tripoli
  • Liechtenstein: Vaduz
  • Lithuania: Vilnius
  • Luxembourg: Luxembourg
  • Macedonia: Skopje
  • Madagascar: Antananarivo
  • Malawi: Lilongwe
  • Malaysia: Kuala Lumpur
  • Maldives: Male
  • Mali: Bamako
  • Malta: Valletta
  • Marshall Islands: Majuro
  • Mauritania: Nouakchott
  • Mauritius: Port Louis
  • Mexico: Mexico City
  • Micronesia, Federated States of: Palikir
  • Moldova: Chisinau
  • Monaco: Monaco
  • Mongolia: Ulaanbaatar
  • Montenegro: Podgorica
  • Morocco: Rabat
  • Mozambique: Maputo
  • Myanmar (Burma): Rangoon (Yangon); Naypyidaw or Nay Pyi Taw (administrative)
  • Namibia: Windhoek
  • Nauru: no official capital; government offices in Yaren District
  • Nepal: Kathmandu
  • Netherlands: Amsterdam; The Hague (seat of government)
  • New Zealand: Wellington
  • Nicaragua: Managua
  • Niger: Niamey
  • Nigeria: Abuja
  • Norway: Oslo
  • Oman: Muscat
  • Pakistan: Islamabad
  • Palau: Melekeok
  • Panama: Panama City
  • Papua New Guinea: Port Moresby
  • Paraguay: Asuncion
  • Peru: Lima
  • Philippines: Manila
  • Poland: Warsaw
  • Portugal: Lisbon
  • Qatar: Doha
  • Romania: Bucharest
  • Russia: Moscow
  • Rwanda: Kigali
  • Saint Kitts and Nevis: Basseterre
  • Saint Lucia: Castries
  •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Kingstown
  • Samoa: Apia
  • San Marino: San Marino
  • Sao Tome and Principe: Sao Tome
  • Saudi Arabia: Riyadh
  • Senegal: Dakar
  • Serbia: Belgrade
  • Seychelles: Victoria
  • Sierra Leone: Freetown
  • Singapore: Singapore
  • Slovakia: Bratislava
  • Slovenia: Ljubljana
  • Solomon Islands: Honiara
  • Somalia: Mogadishu
  • South Africa: Pretoria (administrative); Cape Town (legislative); Bloemfontein (judiciary)
  • South Sudan: Juba 
  • Spain: Madrid
  • Sri Lanka: Colombo; Sri Jayewardenepura Kotte (legislative)
  • Sudan: Khartoum
  • Suriname: Paramaribo
  • Swaziland: Mbabane
  • Sweden: Stockholm
  • Switzerland: Bern
  • Syria: Damascus
  • Taiwan: Taipei
  • Tajikistan: Dushanbe
  • Tanzania: Dar es Salaam; Dodoma (legislative)
  • Thailand: Bangkok
  • Togo: Lome
  • Tonga: Nuku'alofa
  • Trinidad and Tobago: Port-of-Spain
  • Tunisia: Tunis
  • Turkey: Ankara
  • Turkmenistan: Ashgabat
  • Tuvalu: Vaiaku village, Funafuti province
  • Uganda: Kampala
  • Ukraine: Kyiv
  • United Arab Emirates: Abu Dhabi
  • United Kingdom: London
  • United States of America: Washington, D.C.
  • Uruguay: Montevideo
  • Uzbekistan: Tashkent
  • Vanuatu: Port-Vila
  • Vatican City (Holy See): Vatican City
  • Venezuela: Caracas
  • Vietnam: Hanoi
  • Yemen: Sanaa
  • Zambia: Lusaka
  • Zimbabwe: Harare

정말 비주류스럽게 돌아다녔군 ㅠㅠ

 

[구정은의 ‘수상한 GPS’]아프리카가 화웨이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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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프랑스 르몽드는 중국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아프리카연합(AU) 본부를 정탐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기부를 받아 2012년 AU가 새 건물을 지었고 화웨이가 통신설비를 맡았는데 이때부터 중국이 감청 등 정보수집을 해왔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AU가 2017년 서버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 파키 마하마트 AU 의장은 “순전한 거짓 선동”이라고 일축하며 화웨이 편을 들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아프리카연합(AU) 본부. 중국의 자금지원을 받아 지어진 이 건물의 통신설비는 화웨이가 맡아 설치했다. 지난해 서방 언론들은 중국 화웨이가 이곳에서 정보를 수집했다고 보도했지만 AU는 화웨이 편을 들었다. 로이터 자료사진

 

지난달 31일 AU는 중국 화웨이와 정보·통신기술 협력기간을 3년 더 늘리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화웨이는 “양해각서의 목적은 브로드밴드,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컴퓨팅, 5G, 인공지능의 5개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다지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미국은 화웨이를 ‘세계로 퍼진 중국의 스파이’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 AU는 2015년 2월 화웨이와 한 차례 양해각서를 맺었고, 미국과 중국의 ‘화웨이 다툼’이 치열한 상황에서 보란 듯이 다시 이를 연장했다. 중국의 아프리카전문가 필립 왕은 아프리카뉴스에 “AU가 화웨이를 계속 신뢰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간다의 통신망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에서 아프리카도 비껴나 있을 수는 없다.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며 두 고래 사이에서 치이지 않으려 애쓰지만, 이미 화웨이 문제에 얽혀들어가고 있다. 아프리카뉴스는 지난 6일 “그러나 결국 아프리카는 중국에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 정보통신의 근간을 화웨이와 중국 기업이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우간다다. 아프리카뉴스에 따르면 우간다는 2008년부터‘전국 데이터 기간인프라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총연장 2400km에 이르는 광섬유케이블 설치 작업을 해왔다. 중국수출입은행이 이 사업에 1억700만달러를 댔고 화웨이가 사업을 맡았다. 이제 와서 미국이 우간다에 “화웨이와 관계를 끊으라”고 한들,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아프리카연합(AU)의 토머스 크웨시 콰르테이 본부대사(오른쪽)와 중국 화웨이의 필립 왕 부사장이 지난달 31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AU 본부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아프리카연합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중국산 스마트폰은 단돈 30달러에 팔린다. 아프리카에서 쓰이는 스마트폰 3대 중 1대는 중국 선전에 있는 회사 트랜션의 ‘테크노’다.

 

트랜션의 스마트폰에는 2015년부터 중국 기업이 만든 붐플레이라는 음악 스트리밍 앱이 깔린다. 이집트, 나이지리아, 케냐에서부터 시작된 붐플레이 서비스는 4년 새 대륙 전역으로 확산됐다. 지금은 사용자가 4600만명에 이르며, 아프리카 시장점유율은 50%가 넘는다. 최근 미국 CNN은 붐플레이가 아프리카에서만큼은 세계 최대 스트리밍서비스인 스웨덴의 스포티파이를 눌렀다고 보도했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은 중국산 휴대전화에 중국산 앱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다.

 

내륙국가 우간다는 동아프리카의 ‘작지만 강한 나라’다. 우간다와 케냐, 르완다, 에티오피아 등은 인공지능과 로보틱스 같은 정보기술 분야를 도약대로 삼으려 국가적 투자를 하고 있다. 이들의 핵심 파트너가 화웨이다. 단순한 계약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중국과의 정보기술 협력은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에겐 새로운 기회의 문이기도 하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은 2017년 케냐를 방문했을 때 “아프리카의 젊은 기업가 1000명을 지원해 전자상거래, 물류, 빅데이터와 관광부문 플랫폼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에티오피아의 철도

 

AU와 화웨이의 양해각서는 대륙 전역에 걸친 이런 협력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또 현실적으로 화웨이 장비는 가성비가 높다. 화웨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보츠와나, 나이지리아의 몇몇 도시들과 스마트시티 개발 협정도 맺었다. 정보기술을 이용해 치안을 강화하고 ‘물과 에너지를 아껴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니,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도시들의 ‘니즈’를 정말 잘 파고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단순히 아프리카에 건물을 지어주고 석유를 퍼가는 게 아니다. 한 대륙의 인프라를 까는 일을 하고 있고, 그 첨병이 화웨이로 대표되는 중국 기업들이다. 반면 미국은? “아프리카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수준이다. 지난해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런 최후통첩성 발언을 했다. 아프리카가 중국 쪽으로 기울도록 부채질한 꼴이었다.

 

2016년 10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지부티 간 표준궤철도(SGR) 열차에서 중국인 기관사와 승무원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로이터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잇는 표준궤철도(SGR)가 지난해 1월 완공됐다. 유럽 식민국들이 에티오피아에 철도를 깐 이래 ‘100년만의 최대 역사’였다. 건설비용 45억달러 중 25억달러를 중국수출입은행이 빌려줬다. 중국 건설회사들이 철길을 깔고 중국 차량을 들여왔다. 중국철로공정총공사(CRECG)와 그 자회사인 중국철도유한책임회사(CREC)가 운영을 맡았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지부티로 가는 시간은 이틀에서 12시간으로 줄었다. 아프리카 최초의 ‘완전히 전력화된 철도시스템’이라는 아디스아바바 경전철(LRT)도 중국이 2015년 완공했다.

 

SGR이 뚫렸지만 전력공급 불안정에다 기술적인 문제들, 목축민 부족들과의 갈등으로 운영이 순탄치 않다. 수출입 화물 운송량 자체도 기대만큼 많지 않다. 자칫 이 철도는 중국과 에티오피아 양측에 밑빠진 독이 될 수 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학대학원(SAIS) 연구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에티오피아는 중국에 131억달러를 빚졌다. 거기에 철도 빚이 추가됐다. 그런데 중국은 빚 독촉을 하는 대신에 지난해 말 상환기간을 15년에서 30년으로 늘려줬다.

 

대조되는 사례가 에티오피아의 두 도시를 잇는 아다시-웰디야 철도건설 사업이다. 유럽 기업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터키의 야프메르케즈가 계약을 따냈고 터키수출입은행과 크레디스위스가 돈을 댔다. 쿼츠아프리카는 지난 4일 기사에서 “상환일정을 못 지키면 가혹한 벌칙을 적용하기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이쪽 돈은 어김없이 갚는다”고 전했다.

 

겉보기엔 중국이 밑지는 듯하지만, 중국이 에티오피아에서 철도만 까는 게 아니다. ‘전략적 계산’으로 보는 게 맞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앙골라 다음으로 중국에 빚을 많이 진 나라이자,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주요 파트너다. 두 나라는 지난 4월 ‘아셰고다 풍력발전 프로젝트’라는 대규모 계약을 또 했다.

 

지부티의 군사기지

 

‘아프리카의 뿔’에 위치한 인구 88만명의 소국 지부티에는 미군 르모니에 기지가 있다. 소말리아 주변 해상을 비롯해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이는 미국 군사작전의 중심지가 이곳이다. 미군 아프리카사령부 본부는 독일에 있기 때문에, 미군 4000명이 주둔하는 르모니에가 사실상 현장사령부인 셈이다.

 

민간 위성회사 디지털글로브가 2017년 4월 촬영한 동아프리카 지부티의 중국 군사기지. 미국 민간 전략컨설팅회사 스트래트포는 이 기지를 이용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부티의 항구를 거치지 않고도 해상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진 디지털글로브·스트래트포

 

지부티의 도랄레 항구 부근, 르모니에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중국이 2017년 인민해방군 기지를 만들었다. 중국의 첫 해외기지였다. 당시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이 기지를 통해 인도적 지원과 해상안전 강화라는 국제적 의무를 다할 것”이라고 했지만 미국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지부티에서도 중국은 미국처럼 땅을 차지하고 병력을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돈과 기술자들이 함께 갔다. 미군 아프리카사령부 관리는 최근 CNN에 “쉽게 말해 중국은 우리 파트너(지부티)가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을 준다”고 말했다. 토머스 월드하우저 미군 아프리카사령관은 지난 2월 상원에서 “도랄레는 지부티 해상 운송 물동량의 98%가 오가는 곳이고 르모니에 기지도 이 항구에 보급을 의존한다”며 불안감을 표시했다.

 

미국이 보기에 항구와 화웨이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월드하우저의 후임이 될 새 사령관 지명자 스티븐 타운젠드 장군은 4월 상원 청문회에서 “베이징의 통신기술 인프라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미국에 장기적인 안보 위협이 될 것”이라며 아프리카 각국과 화웨이의 구조적인 밀착관계를 거론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중국이 화웨이를 내세워 대륙 전체를 스파이기지로 만들기라도 한 것 같다. “미군의 데이터와 통신흐름이 새어나간다” “(화웨이는) 아프리카 전체에 트랙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에 러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무기를 많이 파는 나라다. 그러나 군사시설을 짓고 무기를 팔 때조차 중국은 ‘빌려주고 지어주고 운영해주는’ 전략을 쓴다. 미국은 이것도 욕하기만 한다. 볼튼은 지난해 헤리티지재단 강연에서 “중국이 아프리카에 뇌물을 쓴다, 빚더미에 가둬놓고 마음대로 움직이려 한다”고 했다. 당장 그 자리에서 근시안이라는 반격이 나왔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뒤 아프리카를 6번 찾았다. 1990년부터 중국 외교부장의 새해 첫 방문국은 언제나 아프리카 나라였다.

 

 

수단의 유혈사태

 

북아프리카의 산유국 수단에서 지난 4월 오마르 바시르 정권이 전복된 뒤 민간인 살상이 거듭되고 있다. 라마단이 끝난 지난 5일에만 수도 하르툼 등지에서 시위대 35~6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방 기업들이 들어가 자원을 파내고 있는 리비아나 나이지리아와 달리 비교적 최근에 개발돼 중국 기업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중국은 서방에 밉보인 바시르를 줄곧 편들어줬다.

 

알자지라방송은 유엔이 수단 사태에 개입하는 걸 중국과 러시아가 막는 바람에 시민 피해가 커졌다고 비판했다. 중국이 억압적인 정권을 편든다는 비난에는 근거가 있다. 수단 사태는 ‘차이나프리카’의 슬픈 그림자다. 그러나 독재정권들과 손잡은 과거의 오점은 미국이 훨씬 많다.

 

영국 옥스퍼드대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 교수는 <약탈당하는 지구>라는 책에서 “서방은 중국을 비난할 게 아니라 아프리카를 위해 중국을 따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이 저개발국들을 돕고 있음을 인정하고, 다만 중국과 그들의 관계가 투명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웨이 스파이론’을 들먹이는 미국은 그 정반대로 가고 있다.

페드루 페레이라, '완벽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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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이론-일반상대성이론 100년사
페드루 페레이라. 전대호 옮김. 까치.


일전에 읽은 <양자혁명-양자물리학 100년사>에 이어, 이번엔 상대성이론 100년사. 과학적 상상력은 도통 없으니 책의 내용을 이해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무쟈게 어려운 수학적 물리학적 설명을 대부분 생략하고도 이 책은 차고도 넘치게 재미있다. 

양자혁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역시 초반부의 주인공은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이어지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를 이어받고 뒤집어보고 궁리해보며 '우주'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많은 물리학자들. 로저 펜로즈나 마틴 리스의 책은 한 10년 전에 읽어본 듯한데, 그 때도 "어렵긴 하지만 정말 멋지다!" 감탄하면서 읽었더랬다. 

100년 전 상투메 프린시페에서 빛의 굴절을 관찰한 아서 에딩턴에서부터 프레디 호일과 스티븐 호킹을 지나 마이클 그린의 초끈이론까지,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아 엄청 신나게 읽었다.

2014.6.3

장 지글러, '유엔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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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서 일한 장 지글러의 책 중 가장 유명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읽지 못했고 <빼앗긴 대지의 꿈>을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얼마 전 책을 주문하면서 지글러의 책 2권도 함께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중 한 권이 <유엔을 말하다>(이현웅 옮김. 갈라파고스)였다. 

 

이 책도 정말 재미있었다. 지글러가 책에서 언급한 사건들은 대체로 내가 아는 것들이나 국제뉴스로 다루기도 했던 것들이다. 유엔 고위간부인 저자가 그 맥락과 이면을 속속들이 전해주니 더 재미있을 수밖에. 이슈의 줄기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듯. 국제부 후배들이나, 세계를 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지난 세기의 후반부 이후 지구 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훑어주는 월드뉴스 요약본으로도 강추.

 

채무에 짓눌리는 국가는 주기적으로 협상해야 한다. 이런 협상은 이전의 채권을 사들이고 '재조정된' 새로운 채권을 유통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재조정된 채권의 가격은 70%나 하락할 수 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제2의 시장에서 유통된다.
벌처펀드는 제2의 시장에서 정상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이전 채권을 매입한다. 그다음에는 채무국가가 그 채권을 100% 가격으로 사들이도록 법정에서 공격한다. 2015년에는 26개의 벌처펀드가 32개 채무국가를 상대로 227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벌처펀드가 승소한 비율은 77%다. 그 기간 벌어들인 이익은 33%에서 1600%까지 이른다.
영국과 미국의 법원은 벌처펀드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1976년부터 2010년까지 두 나라 법원에서 26개 채무국가를 상대로 120건의 소송이 제기됐다. 그중 벌처펀드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진 소송은 89%나 된다.
2002년 말라위에서는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부는 희생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줄 수 없었다. 재해가 일어나기 몇 달 전 말라위 정부는 공개시장을 통해 국립식량비축기관이 비축해둔 4만 톤의 옥수수를 팔아야 했던 것이다. 영국 법정이 벌처펀드가 제기한 소송에서 말라위 정부에게 수천만 달러를 지불하라고 선고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의 논설위원 마틴 울프는 "이런 유형의 펀드를 '벌처'라고 부르는 건 독수리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썼다. (31-32쪽)

런던에 사는 마이클 시한은 버진아일랜드에 주소를 둔 도니골드 인터내셔널의 주인이다. 1979년 잠비아는 루마니아로부터 3천만 달러에 이르는 농기구와 장비를 수입했다. 이후에 도니골은 300만 달러를 주고 루마니아가 보유한 잠비아의 채권을 구입했다. 골드핑거는 런던 법원에 잠비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승소했고, 세계 전역에서 잠비아의 수출 품목인 구리, 잠비아 정부 소유의 부동산, 남아공에 왕래하는 잠비아의 화물차 등을 압류했다. 결국 잠비아 정부는 굴복했고 법정 밖에서 협상을 진행해 155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미국 델라웨어주에 등록돼 있는 FG캐피탈 매니지먼트의 소유주 피터 그로스만은 콩고민주공화국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구 유고의 에네르고인베스트는 콩고강에 댐을 짓는 데 필요한 전자장비를 당시 자이르에 팔았다. 1980년 말, 킨샤사 정부는 대금 지불을 중단했다. 그로스만은 에네르고인베스트(지금은 보스니아 정부 소유다)로부터 채권을 25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뒤 킨샤사 정부에 1억 달러를 지불하라는 법원 명령서를 제시했다. 파리 국제상업회의소가 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로스만은 세계 곳곳에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산 미네랄과 기업의 해외 계좌를 압류했다.
폴 싱어는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NML 캐피탈의 주인으로, 개인 재산이 170억 달러에 이르는 갑부다. 1995년 경제위기가 페루를 뒤흔들어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하자 싱어는 이 은행들의 부실채권을 110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은행 부채에 보증을 선 것은 페루 정부였다. 싱어는 뉴욕에서 리마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0년에 페루 정부로부터 5800만 달러를 얻어냈다. (33-35쪽)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아르헨티나 부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국내 언론들이 유독 물어뜯는 것이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의 '좌파 국가'들이었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지금은 아무데나 다 붙지만 원래 아르헨의 페론주의 등 남미의 좌파 정책을 비꼴 때 많이 쓰이던 말이었다. 한국 언론처럼 아르헨이 망하도록 염불을 외우고 경제가 나빠지면 좋아라 대서특필하는 언론 집단이 또 있을까? 

몇 해 전 아르헨 경제가 나빠졌을 때에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른바 '진보 언론'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용을 잘 모른 채 '위기'를 강조하고(아르헨은 당시 망하지 않았다 -_-;;) '포퓰리즘'에서 원인을 찾고, 그럼으로써 알지도 못한 채로 벌처펀드의 편을 들고.

 

2001년 아르헨티나가 파산했다. [정부는 은행가들을 소집해 2년 간 협상을 벌였고] 은행가들은 결국 채권을 70% 할인하는 걸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부는 재조정된, 이전 가치의 30%인 새 증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예전 증권이 제2의 시장에서 계속 유통되고 있었고, 폴 싱어의 벌처펀드와 다른 벌처펀드들은 정상 가격보다 싼 가격으로 이 증권을 사들였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빈곤과의 싸움에 나선 덕에 2004년부터 극빈자 비율은 인구의 47%에서 16%로 감소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벌처펀드와의 투쟁 전선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말았다.
뉴욕 연방지방법원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로 하여금 폴 싱어에게 채권에 대한 대가로 13억3천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싼 사격에 채권을 사들였던 싱어는 1600%의 이윤을 얻었다. 아르헨티나는 지불을 거부했다. 싱어는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미국에 맡겨둔 금 보유고를 미국 정부가 압류하도록 시도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호위함 리베르타드호가 기니만에서 항해를 하고 있었다. 호위함은 가나의 아크라 항구에 정박했는데, 뉴욕의 판사로부터 요구를 받은 가나 정부는 리베르타드호를 압류했다. 밀을 실은 채 함부르크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배, 마이애미에 착륙해 있던 비행기 등, 벌처펀드로부터 돈을 받은 변호사들은 세계 도처에서 아르헨티나의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시도했고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36-37쪽)

 

지글러는 유엔에서 미국(그리고 이스라엘)과 연신 부딪쳐야 했고,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을 위해 싸워야 했다. 이어지는 것은 지글러가 아르헨과 함께 싸운 과정, 인권이사회에서 '승리'를 거둔 내용 등이다. 하지만 결말은? 처참하다.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였다. 그녀는 전략을 바꿨다. 벌처펀드에 굴하지 않으면서 유엔 인권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제네바에 파견될 인물로 명망이 매우 높은 알베르토 페드로 달로토를 임명했다. (37쪽)

2016년 2월 15일 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는 거기서 벌처펀드의 활동이 세계 모든 국가의 법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선의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채권자가 한 국가에서 발행한 공채나 채권을 사들이면서 불법적인 이익을 추구할 때, 채무자인 국가에 대한 그의 권리는 공채나 채권을 사들이는 데 지불한 가격으로 한정돼야 한다. 현재의 기준으로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서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외국의 중재 판결이나 유죄 판결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41쪽)

적들은 전략을 바꿨다. 유엔 안에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조상이 사용했던 전략, 즉 덜 복잡하면서도 효과가 있는 전략을 채택하기로 했다. 바로 부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2015년 12월에 대선을 치렀다. 크리스티나가 지지한 후보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지방 출신의 우파 정치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우파 정치인이 당선되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쓴 것이다. 
대통령이 된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벌처펀드가 요구하는 것들을 지체 없이 들어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임기 첫 6개월 동안 벌처펀드에 약 100억 달러를 지불했다. 그는 선임자들이 약속한 사회복지 예산을 대대적으로 감축해 이 돈을 마련했다. 동시에 국제 금융시장은 아르헨티나에 문을 개방했다. 이 나라는 다시 빚을 졌고, 2016년 3월부터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진 빚이 150억 달러에 이르렀다. 불가촉천민 취급받던 아르헨티나는 순식간에 국제 금융시장이 소중히 여기는 나라가 되었다. 
2015년까지 셸 아르헨티나 CEO를 지낸 다음 에너지장관이 된 후안 호세 아란구엔은 새 대통령 임기의 첫 6개월 동안 에너지와 관련해 8개의 중요한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 중 7개는 셸에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42-43쪽)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나오는 말처럼]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내가 벌처펀드를 상대로 벌인 투쟁에서 겪은 패배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쿠바의 작가 호세 마르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리는 한번 깨어나면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폴 싱어는 아르헨티나 국민과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 제도의 수많은 국민과의 싸움에서는 이겼다. 하지만 우리는 싱어와 그 부류의 사람들을 장막에서 끌어냈다. (59쪽)

 

지글러는 유엔이 가진 한계를 직시하고 분노하면서도, '의지의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다. 

 

유엔은 엄격한 구조를 지닌 조직이라기보다는 23개의 전문기구,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를 옛날식 일본어 표현대로 번역;;), 관리조직, 기금, 프로그램 등이 중앙행정기구를 옆에 두고 서로 공존하는 성운 같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기구는 행정적으로 서로 독립해 있어 자체적으로 예산을 보유한다. (74쪽)

 

유엔의 일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에 대한 지글러의 관찰들은 쉽게 들어보기 힘든 것들이라 재미있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은 세계식량계획(WFP)으로 실현되고 있는 작업이다. 이 기구 덕분에 2015년에는 세계 9100만 명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수단의 서부, 케냐 북부,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에서는 무장강도가 WFP 소속 화물차를 주기적으로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물자를 약탈당하고, 차량이 소각되고, 이따금 운전수가 살해당한다. 이러니 WFP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존경을 받을 만하다. 매번 여정에 오를 때마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WFP는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기구다. 이 기구는 5개 대륙에서 응급창고를 관리한다. 세계 시장에서 주요 식량의 가격이 낮아질 때면 WFP는 수천 톤의 재고를 비축한다. 이 기구는 자체적으로 5천 대의 화물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한 운전수를 고용하고 있다. 로마에 있는 WFP의 운송부는 항공기도 이용한다. 남수단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십만 명에게는 육로나 강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런 때는 화물기가 상공에서 식량 박스를 투하하는데, 박스가 지면과 충돌했을 때 생기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낙하산을 이용한다. WFP의 항공기는 유엔 내에서도 유명해서 많은 부서가 이 항공기를 빌려 쓰기를 원한다. 이 항고기가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고 조종사의 기술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튀니지의 시디부지드 태생의 생물학자 달리 벨가스미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그는 30년 간 WFP를 이끈 중요한 지도자였다. 그는 2015년에 병과 과로로 사망했다. (75쪽)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기구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국제연맹이 개입해 창립됐다. 창립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개 장 조레스의 오래된 협력자들인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가령 사회주의자이자 국회의원인 알베르 토마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조레스의 비서였던 동시에 제네바대학교 교수였던 경제학자 에드가 미요도 있었다.
장 조레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날인 1914년 7월 31일에 암살당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보물, 곧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일과 사회적으로 부당한 일에 저항하는 것은 알베르 토마와 에드가 미요와 이들의 ILO 동료들이 이끈 투쟁 덕분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ILO 감시관은 유엔 회원국이 자발적으로 조인한 191개의 국제협약을 적용하는지 조사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 유엔의 23개 전문기구는 거의 모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고유한 예산을 할당받는다. 국가 간 이사회가 이 기구들을 통제하는데, ILO만은 예외다. 이 기구는 노동조합원, 경영주, 국가 대표자가 동일한 인원으로 참석하는 3자 이사회가 운영한다. (78-79쪽)

 

예전엔 일본식으로 신문 기사에서도 유엔난민기구를 '난민고등판무관실', 인권기구는 '인권고등판무관실' 이런 식으로 썼었다. 지금은 유엔난민기구가 됐고 그 수장인 High Commissioner를 난민기구 대표라고 부른다. 난민기구(UNHCR)를 이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난민기구 대표는 필리포 그란디이고, 그 전에 지금의 유엔 사무총장인 안토니우 구테흐스가 맡았었다.

 

난민기구는 1차 대전 뒤의 독일로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유서깊은 실체인 반면, 유엔 내에서 난민기구와 함께 High Commissioner를 두고 있는 양대 기구인 유엔인권기구는 좀 달랐다고 한다. 지글러는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사무총장에 대한 경애심을 한껏 표시하면서 이 기구를 둘러싼 곡절을 설명한다.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인권기구라고 써야 함;;)는 자체 예산도 없고, 독립적인 국가 간 행정이사회도 없으며, 행정적으로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의 한 부서에 불과하다. 사실상 이 기구의 명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냉전 시기의 대립 때문에 '인권'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상황 이후에) 1992년, 뉴욕 유엔본부의 39층에서 한 예외적인 인물이 유엔 사무총장 자격으로 총회도 안전보장이사회도 열지 않은 채 역사적인 일을 시도했다. 제6대 사무총장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였다. 그는 지적인 사람이자 오랜 기간 장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유용한 경험을 쌓은 이집트의 파샤였으며 섬세하고 박식한 법률학자였다. 

그는 1993년에 빈에서 인권과 관련된 세계 회의를 직권으로 개최했다. 이 회의는 1948년에 파리에서 진행된 이래(이 때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됐다)두 번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된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냉전 시절 서방이 소련 진영에 요구했던)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소련이 '서방이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한)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하나의 새로운 선언에서 결합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인권을 말하는 주체의 선의와 성실성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는 신뢰성에서 이점을 이끌어냈다. 그가 역사적인 순간에 한 자리에 모인 171개국의 대표에게 '빈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제출한 결의안 초안은 1993년 6월 25일에 채택됐다. 미국 대표들은 투표 순간에 기권했다.

이 이집트인은 빈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까지 유엔은 제네바의 윌슨 궁에 위치한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기구'만 두고 있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라는 명칭이 붙은 새 기구의 창설을 두고 투표에 부쳤다. 그는 능숙하게 일을 진행했고, 제네바의 그 작은 기구는 예전보다 더한 위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부트로스 갈리는 미국 대표들을 달래기 위해 새 기구가 유엔 본부의 한 부서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했다. (84-86쪽)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와 이사회의 관계는 복잡하고 갈등도 빈번하다. 우선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건 이사회다. 이사회는 두 가지 임무를 맡고 있다. 유엔 193개 회원국이 각각 수행하는 인권 정책을 감독하고, 이전에 없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에 맞는 타당한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인권이사회는 특별조사관을 두고 있으며 임시 회의를 제외하고 매년 3번에 걸쳐 3주씩 진행되는 정기회의 동안에는 제네바에 소재를 둔다. 유엔 사무국의 한 부서일 뿐인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는 법적인 권한이 없으므로 필요할 때 인권이사회의 비서실 역할을 하고, 특별조사관을 기술적 행정적으로 지원한다. 이 부서는 5개 대륙에, 곧 튀니스, 암만, 보고타, 카트만두 등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87쪽)

 

지금의 인권최고대표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는 칠레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 바첼레트는 여러 모로 관심이 많이 가는 인물이었는데, 퇴임 뒤에 적절한 역할을 맡은 것 같다. 

 

인권이사회를 일그러뜨리는 '관제 시민단체'들의 존재와 그들로 인한 인권 논쟁의 '부패'는 새겨들을 대목.

 

인권이사회는 시민단체에게 국가와 동등한 지위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런 기구는 유엔 내에서 인권이사회가 유일하다. 뉴욕에는 소위 '자격 B'라고 하는 특별한 절차가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유엔의 비정부기구위원회는 어떤 NGO나 사회적 종교적 운동의 구조, 창립 경위, 능력을 조사하고 그들에게 심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지 결정한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도 부패가 모든 걸 타락시키고 있다. 어떤 국가는 완전한 'GONGO(국가가 조직한 비정부기구 Government-Organized Non-Govenmental Organization), 곧 정부가 범죄를 은폐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비정부기구를 만드는데, 중국이 그런 예다. 1990년대 이래로 중국은 파룬궁을 박해하고, 2012년부터는 수련자들을 사형시키거나 고문을 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 서구의 비정부기구, 교황대사, 세계교회이사회는 인권이사회 앞에서 이 범죄를 고발했다. 그러자 갑자기 '중국의 종교적인 자유를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중국 자유사상가연합' 같은 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사실 이런 운동과 단체는 중국이 만든 것이었다. 중국에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증언을 하겠다며 자격 B를 획득한 다음, 인권이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에도 한 용병 같은 NGO가 인권이사회에 등장해 사형제도, 법원 판결에 따른 신체 절단, 채찍으로 때리는 고문 등이 코란에 언급돼 있다는 이유로 극찬했다. (97-98쪽)

 

미국이 미워하는 행동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래서 실제로 미국의 미움을 받아온 사람답게, 책의 상당 부분에서 지글러는 미국을 비판한다. 

 

유엔이라는 조직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다자외교와 헨리 키신저의 제국주의적 이론은 상반된다. 하지만 유엔은 미국의 지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은 중앙행정기관 예산의 26%에 해당하는 100억 달러를 유엔에 매년 지원한다. 23개 전문기구는 각각 자체적인 예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 예산은 일반예산과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구성되는데, 평균적으로 예산의 30~40%만이 회원국의 일반분담금으로 충당된다. 세계식량계획의 경우 미국은 자금을 지원하거나 국내 잉여 곡물을 기부하는 형태로 예산의 62%를 담당해왔다. (153쪽)

유엔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사무국은 평화유지활동국(DPKO)이다. 이 사무국의 한해 예산은 70억 달러가 넘고, 그중 많은 부분을 미국이 분담한다. 그런데 유달리 사악한 자금 지원방식이 있다. '전용 기부금'이라 불리는 이 기부금은 자발적으로 기부된 것이지만 기부자는 이 돈이 특정한 목적에 쓰이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네팔, 부탄, 라다크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해하던 워싱턴은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에 천만달러를 기부했다. 카트만두에 사무소를 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54쪽)


유엔 고위직 임명에는 예상대로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데,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것에 대한 지글러의 평가는 냉혹하다. 

 

유엔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국제공무원이 있다. 일반 스태프는 행정직원이고 두 번째 부류로는 전문가들이 있고 세 번째 부류로는 국장 급의 사람들이 있다. 가장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들은 사무총장, 사무부총장, 사무총장보, 전문기구와 기관의 사무총장, 고등판무관이다. 첫번째와 두번째 부류는 G나 P의 1부터 5까지의 등급에 따라 지위가 결정된다. 국장급은 두 가지 등급, D1과 D2만 있다. 국장급은 평균적으로 한달에 세금이 면제된 2만5천 달러를 받으며 외교관 면책특권을 갖는다.
인사는 물론 능력에 따라 선발돼야 하지만 유엔 기구의 보편성과 대륙 간 균형을 보장하기 위해 지리적 민족적 출신 성분도 고려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회원국 간의 길고 복잡하고 상당히 모호한 협상이 진행되고 나서야 지명 여부가 결정된다. 
적어도 문서상으로 유엔은 엄격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하지만 미국이 제네바와 뉴욕에 파견한 사람들이나 미 국무부와 CIA가 유엔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조심스럽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감시하고 있다. P 부류에 속하는 직원들은 거의 대부분 감시대상이다. P3 이상의 직위에 임명될 후보자는 승인을 얻기 위해 신중하게 미국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일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기문이 선출된 일은 사무총장을 결정짓는 방식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걸 잘 보여준다. 2006년에 아프리카인 코피 아난의 임기가 끝났다. 5개 대륙은 순서대로 사무총장직에 후보를 내보내는게 불문율이다. 이번에는 아시아 차례였다. 가장 적합한 후보는 사무차장인 데다 작가이기도 한 샤시 타루르였을 것이다. 그의 능력과 경력은 문제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타루르는 인도인이다. 파키스탄은 타루르가 조명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이슬람회의기구(OIC) 동맹국들을 소집했다. OIC는 57개국으로 구성돼 있고 파키스탄이 대변인 역할을 한다. 카슈미르 출신으로 파키스탄 유엔대사인 마수드 칸은 맹렬한 캠페인을 벌였고, 타루르는 후보군에서 빠지고 말았다. 

이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후보를 내보낼 수 없었다. 그 대신 중국은 한국의 외교장관으로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반기문을 무대로 나서게 했다. 중국 정부에게 한국인이 사무총장에 지명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에게 상임이사국 자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으로서는 남한이라는 가신 같은 공화국 출신의 국민이라면 자신들에게 충성심을 가질 거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 또한 반기문과 연대했다. 르 케도르세(프랑스 외교부)는 서툴지라도 프랑스어를 몇 마디 할 수 있으면 누구든 지지하는 관례가 있기 때문이다. (157-158쪽)

 

프랑스... 뭥미 ㅋ

 

이제, 지글러가 마음 아프게 회상하는 지 멜루 이야기.
책 맨 앞쪽에 "2003년 8월 19일에 바그다드에서 암살당한 인권고등판무관 세루지우 비에이라 지멜루와 그의 21명의 동료들에게"라고 쓰여 있다. 그 사건은 너무 충격적인 폭탄테러여서 나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비에이라 지멜루를 직접 알고 있었던 지글러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다만 '암살당한'이라는 번역은 옥에 티)

 

기적적으로 인권고등판무관 자리는 미국에 종속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연속해서 차지할 수 있었다. 완고한 성격에 아주 훌륭한 인물인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에 이어 용감한 캐나다 여성 루이즈 아버가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 그녀는 헤이그의 국제재판소에서 구 유고슬로비아에서 자행된 범죄를 다루는 다루는 검사로 활동했다. 이후 타밀족 출신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비 필라이가 고등판무관으로 있었다. 그녀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운동가들을 변호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 유엔은 그녀를 탄자니아 아루샤특별재판소에 지명해 르완다 학살자들을 재판하게 했다.
메리 로빈슨과 루이즈 아버 사이에는, 윌슨 궁전에서는 잊을 수 없는 세루지우 비에이라 지멜루가 있었다. 그는 2003년에 21명의 동료와 함께 바그다드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2014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반기문은 나비 필라이의 임기 연장을 거부했다. 그는 그 자리에 미국이 비밀리에 제공하는 자금과 지원에 의지해 존속하고 있는 요르단 하심 왕조의 자이드 라아드 자이드 알후세인 왕자를 지명했다. (158-159쪽)

 

자이드 왕자에 대해 지글러는 아주 비판적이다. 미국에 붙어 먹고 사는 요르단 출신이라는 것, 취임 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연설할 때 관례를 깨고 '동영상 연설'을 내보내 모욕을 줬던 일 등을 언급한다. 유엔 인권최고대표로서 평판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자이드 왕자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한일 위안부협정을 맺었을 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할머니들이 뉴욕에 찾아갔지만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만나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기문은 합의가 이뤄지자마자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었다(뒤에 대선후보로 나선다고 할 때에, 기자들이 이 문제 물어보니 "나쁜 놈들"이라고 버럭~ 성을 내며 위안부 얘기 그만하라고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자이드 최고대표가 제네바에서 "보상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피해자들만이 말할 수 있는 문제"라며 할머니들 입장에 서서 발언을 했고, 부랴부랴 반기문은 할머니들을 면담하기로 결정했었다.

 

DPKO는 국제연합군을 지휘한다. 국제연합군은 평화유지 peace keeping 와 평화창설 peace making 이라는 확실하게 다른 두 가지 임무를 맡는다. 평화유지 작전은 외교관들이 분쟁을 종결시키기로 협상한 이후에 시행된다. 이 작전에는 휴전선을 감시하고 휴전 상황을 관리하는 일이 포함된다. 평화 창설 작전에는 선전포고를 하는 일이 포함된다.

 

드디어 말 많은 평화유지 작전 문제로 넘어왔다. '인도적 차원의 군사개입'에 대해서 말하자면 끝이 없을테니 넘어가고. 평화유지군 자체와 관련해서 가장 말 많았던 사례 중 하나가 아이티였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이 일어난 뒤에 이재민 돕는다고 들어간 유엔 평화유지군이 오히려 콜레라를 퍼뜨려재난을 악화시킨 사례다. 깔끔하게 사과하고 처리했어야 하는 걸 계속 부인하고 변명하고 미루다가 6년 뒤에야 반기문 사무총장이 사과했다. 

 

유엔이 벌인 평화유지 작전들

 

아이티에 파견된 평화유지군 상당수가 네팔 병사들이었다. 지글러에 따르면 "국제연합군은 회원국이 할당한 병력으로 구성되는데 거의 대다수가 과테말라,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같은 아주 가난한 국가 출신"이다. 2016년 기준으로 연합군 수는 10만 명이 넘고, 여기에 민간인 2만 명이 덧붙는다고. 114개국에서 온 "이들에게 평화유지 임무란 나날의 빵을 의미한다. 국제연합군은 레바논 남부, 키프로스, 코소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국경 분쟁 지역, 수단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사하라 사막 서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아이티 등 32개국에서 휴전선을 감시하는 중이다." (176쪽)

 

전체적으로 번역이 목에 걸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문장이 깔끔하지 못한데, 위에 옮겨적은 부분도 그런 예. '사하라 사막 서부'는 아마도 모로코 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는 서사하라(고유명사)를 일반적인 지역소개처럼 옮긴 것 같고. 아이티의 경우 '휴전선을 감시하는' 건 아니다.   

 

지글러는 평화유지 임무 등을 다룬 '전쟁과 평화, 유엔의 고뇌'라는 챕터에서 북한 방문담을 소개하고 있다. 1978년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친서방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북한까지 가게 됐으며, 김일성 주석까지 만났다고 한다. 지글러는 서방의 오만과 횡포와 일방주의를 극렬 비판해온 '좌파' 지식인이지만, 독재정권이나 억압적인 정권에 대해서도 물론 비판적이다. 그래서 김일성과의 만남을 비롯한 북한 방문 에피소드는 좀 냉소적인, 그로테스크한 소극(笑劇) 같은 톤으로 묘사했다.

 

유엔과 함께 해온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듯 풀어놓은 이 책에서 지글러는 김일성을 비롯해 무아마르 카다피, 사담 후세인과 만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늘 그렇듯, 누군가가 '반미 지도자'와 접촉하면 미국과 서방은 그를 '독재자의 친구'로 몰아간다. 독재정권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라고 몰아감으로써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미국에 맞선 이들과 접촉한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위험을 감내해야 하지만, 지글러 같은 이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좀 더 본질적인 위험도 있다. 미국에 맞선 이들이 언제나 옳은 사람들인 것은 아니다. 카다피와 사담처럼 자기네 국민을 학살하고 억압한 자들도 들어 있다. 카다피는 아랍어로 번역된 <빼앗긴 대지의 꿈>을 읽고 지글러를 초대했다(203쪽)고.

 

카다피에 대해 지글러는 "집권 초기에는 진정한 혁명가였다. 나세르로부터 군인 서임식을 받았고 유럽 반제국주의 운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썼다. 유럽 기업들로부터 에너지 산업을 거둬들인 국유화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와 폭격들을 겪으면서 차츰 이성을 잃었고, 그의 원칙을 망각한 채 광란 상태에 빠졌다"(207쪽)고 적었다. 대체로 세간의 평가와 비슷한 것 같다.

 

사담에 대해서는 나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인간에게서는 잔혹성과 폭력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의 활기찬 기운, 빠른 몸짓,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선은 먹이를 잡을 기회를 엿보는 호랑이를 떠올리게 했다."(211쪽)

 

독재자들의 벗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지글러는 자신의 행동에 결과적으로 그런 비난을 부를 소지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후회를 표시한다. 하지만 미국과 서방의 이중잣대에 대해 신랄히 반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반인도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국제형사재판소(ICC) 문제를 담은 챕터의 제목이 '이스라엘 장관이 헤이그 법정에 서는 날이 올까'로 돼 있다. ICC 문제를 논하려면 결국 던져야 하는 질문이 이 문장에 그대로 적혀 있다. 

 

(ICC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로마조약)의 제8조는 전쟁범죄와 관련돼 있다. 전쟁범죄는 1949년에 채택된 제네바 4개 협약과 1977년 이 협약에 추가된 2개의 의정서 내용을 위반하는 모든 중대한 범죄를 말한다. 이 조항은 전쟁의 야만성에 제한을 두는 국제인도법의 핵심 규칙을 담고 있고, 포로와 부상자를 대우하는 문제는 물론 민간인을 보호하는 문제와 관련된 법을 제시한다. (221쪽)
집단살해 genocide라는 용어는 1943년 폴란드 법률가 라파엘 렘킨이 나치에 의한 유대인과 집시의 절멸, 그리고 1915년에 일어난 터키인에 의한 아르메니아인의 절멸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집단살해 개념은 뉘른베르크 법정의 기소장에서 나타난다. 1948년 유엔의 제안에 따라, 집단살해는 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하고 차단하기 위한 협약에서 특별한 범죄로 확고히 인정되기에 이른다. 
반인도적 범죄는 한 민적 전체를 말살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어떤 집단이건 간에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려고 한다. 희생자 집단을 대상으로 살인, 신체 절단, 고문 같은 '일반적인' 범죄를 대규모 차원에서 감행하는 것이다. (222쪽)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이 아닐까. 지글러가 특별히 언급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유혈사태다. "그곳은 무기를 소지하고 키부의 숲과 사바나 지대로 도피한 르완다의 옛 후투족 집단살해자들인 인테라하므웨에 의해서 황폐화되고 있다. 여기에 '신의 저항군'이라는 살인자들이 가세한다.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키부의 바푸엘로족과 바시족 여성을 강간하고 성적으로 잔혹한 피해를 입혔다. 이 '전사들'은 남자들을 벌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와 딸을 강간한다. 항문과 질을 잘라 불구로 만든다. 전통적인 바시족, 바푸엘로족, 반야르완다족 사회에서 강간의 희생자는 마을에서 추방되고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는 죽음이라는 '처벌'을 받는다." (223쪽)

 

이곳 여성들이 겪는 일은 제노사이드일 뿐 아니라 젠더사이드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 여성들을 도와온 의사 데니스 무퀘게가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무튼, 전쟁범죄와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로마규정에서 열거된 모든 범죄를 실제로 ICC에 제소한다면 그곳 직원은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ICC가 심판하고 형벌을 내린 사람들이 모두 아프리카 출신뿐이라는 것이다." (224쪽) 실제로 이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반발한 적도 있었다. 

 

옛 유고연방과 르완다의 반인도범죄를 다루는 재판소 활동과 관련해서 캐나다 출신 검사 루이즈 아버와 스위스 출신 칼라 델 폰테를 소개한 대목(227쪽)은 흥미롭다. 

 

아주 꼼꼼한 루이즈 아버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헤이그와 아루샤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이어서 캐나다 대법원의 판사(대법관이라고 좀 쓰지)가 됐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으로 활동했다. 
1999년 루이즈 아버의 뒤를 이어 칼라 델 폰테가 검사가 됐다. 그는 2003년까지 아루샤에서, 2007년까지 헤이그에서 일했다. 이 끔찍한 여인은 1994년에는 스위스연방 검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녀는 나의 면책특권을 없애려고 시도하고, 1998년에는 대반역죄라는 죄목으로 나를 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칼라 델 폰테는 조직적인 범죄 카르텔과의 싸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판사 조반니 팔콘과 연합한 그녀는 시칠리아 마피아의 몇몇 카르텔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팔콘과 델 폰테는 사상 초유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현장에서 살인자들을 공격하는 대신, 취리히와 제네바의 은행에서 마피아의 계좌를 압류하는 작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228쪽)

 

루이즈 아버는 인권최고대표 시절 한국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칼라 델 폰테는 인권이사회의 시리아 전범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윌슨 궁전의 엘리베이터나 카페테리아에서 이따금 그녀와 마주친다. 오늘날까지 그녀는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화를 풀지 않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미테랑은 세르비아의 살인자들이 헤이그로 인도되는 절차를 수년 동안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229쪽)

 

지글러는 여러 특별재판소 중에 가장 실효성이 있었던 곳으로 르완다 재판소를 꼽는다. 그 수훈갑은 세네갈 법률가로 르완다 재판소의 수석서기를 맡고 있던 아다마 디엥이었다고. 르완다 내전 뒤 후투족 살인자들이 아프리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이들을 추적한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아다마는 추적팀을 만들어 특수부대를 투입시켰고, 말리의 전 경찰서장이 지휘를 맡았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온 비밀요원, 경찰, 수사관으로 구성된 이 특수부대는 모든 곳을 뒤졌다. 이들은 콩고의 숲이나 아비장의 난민촌이나 다카르의 호화스런 건물에서 범죄자를 잡으면 결박한 다음 가건물에 가뒀다. 그러면 범죄자는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동시에 특수부대가 해당국 정부로 하여금 이 '짐짝'을 아루샤의 재판관에게 보내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체포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230쪽)

 

르완다에 후배 두 명을 출장보낸 적 있는데, 둘 다 다녀와서 '좋았다'고 했다. 성장 잠재력이 있고 '될성 부른'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실제로 르완다는 성평등지수에서 대략 세계 6위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다. 폴 카가메의 장기집권에 대해 서방의 비판이 적지 않지만, '독재국가'라고 찍어누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글러가 뒤이어 소개한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는 잠시 스쳐가며 본 적이 있다. 거기 찰스 테일러가 잡혀 있다고 했었는데, 뒤에 헤이그로 이송됐다.

 

뒷부분의 '나는 왜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었나'라는 부분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사람을 어떻게 몰아붙이는지 보여준다. 난민고등판무관을 맡았던 사드루딘 아가 칸과 이란 이스마일파의 위상(279쪽), 아라파트가 겪어야 했던 굴욕과 말년의 고립(295쪽), 이스라엘 방문 때 느꼈던 분노와 유엔에서 다시 한번 느껴야 했던 무력감(323쪽) 같은 것들은 생생한 체험담이라 눈길이 갔다.

 

인간의 실존을 특징짓는 수많은 부조리한 일 가운데 가장 명백하면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인류가 오늘날까지 전쟁을 멈추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능력은 경이롭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과학적, 기술적, 인식론적으로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분야를 정복하는 매 순간마다, 전쟁의 병리는 더 효과적으로, 더 위협적으로 기능한다. (331쪽)
인도주의적 개입은 회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걸까?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사람을 보호할 책임은, 비록 이것이 그 사람의 정부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유엔의 토대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비 필라이는 콜롬비아와 과테말라에서 행해지는 인권침해를 중단시키기 위해 유엔의 '보호할 책임'에 호소하면서도 그것이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 나라들은 미국의 보호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거부권에 의지해 유엔의 조치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념은 부상하고 있다. 이 이념은 주권주의자들의 악착같은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진보하는 중이다. (344-345쪽)

 

리비아 내전에 서방이 개입할 때 국내에서도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주권침해'를 거론했고, '미국의 음모'를 들먹였던 걸 기억한다. 인권보다 중요한 주권은 없다. 그런 지적이 필요할 때도 없지 않지만, 단순 논리에 매몰되면 아랍 민중들이 일으킨 '아랍의 봄'을 '미국의 음모'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전쟁 못잖게 배제와 착취에 맞서야 한다는 것으로 지글러는 결론을 맺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십계명 중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경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소비문화는 지속적으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착취와 억압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상황입니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속하지 못하느냐와 같이 존재의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선택의 순간에 사회의 최하층이나 빈민가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밖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입니다. 배제당한 사람들은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무엇이 됩니다." (350쪽)

 

유엔의 기나긴 행보를 짚어본 뒤 프란치스코의 말로 끝을 맺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지금 이 지구에서 가장 큰 문제이자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 저들,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상태로 버림받고 경제활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되어 '세계의 잉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난민,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 니트족, 노예 같은 존재들. 21세기의 가장 큰 도전이 될 이 문제에 유엔과 국제사회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기협 칼럼] 100년의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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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에는 날마다 언론보도를 팩트체크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팩트를 점검하는 것은 언론의 기능인데, 다른 무엇도 아닌 언론이 점검의 대상이 돼버렸다. 팩트가 틀린 기사가 너무 많으니 이젠 기자들이 어떤 의도로 뭘 어떻게 틀렸는지 시민들이 체크한다. 정치적 분열과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언론 기사와 팩트체크가 한쌍으로 묶여버렸다..
 

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조사에서 한국의 언론 신뢰도가 38개국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는 보도를 봤다. ‘뉴스 대부분을 신뢰할 수 있다’고 응답한 사람 비율이 한국에선 22%에 그쳤다. 5명 중 4명은 언론을 안 믿는다는 게 놀랍지도 않다. 이 조사결과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야말로 언론인들이 놀라야 마땅한 현실이다.

틀리고 왜곡된 보도가 너무 많다는 것을 언론인들도 부정하지 못한다. 일전에 팩트체크를 주제로 언론학 논문을 쓰고 있는 후배를 만났다. 언론사들이 자기네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팩트체크라는 형식을 이용하고 있는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다. 팩트체크 자체가 매체 성향에 따라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팩트체크의 팩트체크, 혹은 팩트체크의 팩트체크의 팩트체크… 이런 것들이 줄줄이 이어지지 않을까.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로이터연구소 조사에서 언론 기사를 대부분 믿는다는 시민이 50%가 넘는 나라는 6개국뿐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재작년 실린 팩트체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1923년에 이 잡지가 창간될 당시는 19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옐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많았고, 미국 언론계에서 팩트에 충실하자는 흐름이 일어났다고 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게 초창기엔 ‘여자들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낸시 포드라는 여성이 발행인 비서로 일하면서 기자들에게 기사 스크랩을 해줬는데, 그러다가 보도에 나오는 날짜나 사람 이름 등을 확인하는 일로 업무가 확대됐다. 기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포드를 비롯해 당시의 팩트체커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부수적인 일 정도로 여겼던 것일까. 아니면 사실을 확인해서 쓰는 저널리스트의 본분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대였기에 별도의 팩트체크는 보조적인 일로 여겨졌던 것일까.
 

낸시 포드 이후 100년이 지났는데 언론은 어느 때보다도 신뢰를 잃었다. 사실 한국 언론은 100년 전에도 왜곡과 오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언론의 신뢰도는 어디에서 올까. 언론은 지금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그런데 어느 야당은 정권이 언론을 장악했다고 하고, 그걸 또 어떤 언론들은 받아적는다. 어떤 매체는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바닥이라는 기사에다가 ‘단독’이라는 말까지 붙여 인터넷에 올린다. 독자의 신뢰를 얘기하기조차 민망하다. 시민들은 100년간 불신을 쌓아오다가 이제 겨우 입 밖으로 꺼낼 도구를 찾은 건지도 모른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내전 끝나가는 시리아, '부동산 개발' 눈독들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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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

시리아 최고 부자라는 사메르 포즈(44)를 그 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아만홀딩그룹을 이끄는 그를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 신흥재벌들에 비유해 ‘시리안 올리가르흐’라 칭한다.

 

시리아의 시민 구급대 ‘하얀 헬멧’ 대원이 22일 북서부 이들리브에서 구조활동을 하다가 정부군 폭격으로 무너진 집터에 앉아 쉬고 있다.  이들리브 AFP연합뉴스

 

2011년 내전이 터지자 시리아 정부군은 다마스쿠스, 알레포의 주거지역과 시장과 유서 깊은 옛 도심에 드럼통 폭탄과 미사일을 퍼부었다. 무너진 집들을 남기고 시민들은 피란길에 올랐다. 주민이 떠난 폐허에서 포즈 같은 사람들은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부동산 개발을 하고 있다. 다마스쿠스의 포시즌스호텔은 사우디아라비아 갑부인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가 갖고 있었는데, 알왈리드 왕자가 왕실 권력투쟁에서 밀려 2017년 구속됐다. 그후 이 호텔도 포즈가 사들였다.

 

‘시리안 올리가르흐’

 

변호사 출신 사업가인 포즈는 지난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돈을 벌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애국심을 들먹이면서 그는 땅을 사들이고 돈을 번다. 그 과정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의 도움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말 유럽연합(EU)이, 이달 11일에는 미국이 포즈를 경제제재 대상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제재를 받든 안 받든 포즈는 내전으로 돈을 벌었고 지금은 ‘재건사업’을 하고 있다.

 

포즈는 런던에서 웹사이트와 인터넷 방송을 만들어 ‘재건 펀딩’을 한다. 카리브해의 조세회피처 세인트키츠앤네비스에 15만달러를 투자하고 그 섬나라 여권도 얻었다. 돈 앞에선 복잡한 내전 구도도 아무 의미 없다. 터키 매체 TRT월드 등에 따르면 포즈는 아사드 정권에만 줄을 댄 것이 아니라 아사드의 적이었던 극단주의 무장세력과도 곡물 거래를 했다. 아사드 정권과 싸운 쿠르드계 민병대 YPG에게도 식량을 팔았다.

 

시리아 사업가 사메르 포즈는 ‘상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미국은 내전 기간에 시리아 곳곳의 땅을 사들이고 여러 무장세력과 거래한 포즈를 최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사진 시리안옵저버

 

세계은행은 8년 간의 전쟁으로 시리아 전체 주택의 3분의 1이 무너지거나 파손된 것으로 본다. 내전 전에 2100만명이던 인구는 급감했다. 해외로 떠나 난민이 된 사람이 560만명에 이른다. 660만명은 집을 떠나 나라 곳곳에 흩어진 국내 유민이 됐다.

 

아사드 독재정권에 싸움으로 내전이 시작됐지만 이슬람국가(IS) 같은 극단세력들이 끼어들고 쿠르드계 민병대가 가세하면서 전선이 뒤엉켰다. 미국과 러시아의 폭격에 터키, 이란, 프랑스, 아랍국들까지 끼어들었다. 최대 피해자는 시민들이다. IS 세력은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오랜 내전에도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기는커녕 ‘다시 아사드’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아사드에 여전히 맞서고 있는 세력은 대체로 비아랍계 소수민족들이나 외국 지원을 받는 집단들이다. 민간인 11만명 이상이 숨진 대가가 이것이라면 참혹하다.

 

난민 집 빼앗아 부동산 개발?

 

“러시아와 이란에 감사한다. 터키와 미국은 떠나라.” 지난 18일 왈리드 무알렘 시리아 외교장관은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을 만나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전이 아사드 정권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것으로 풀이됐다.

 

전황은 확실히 아사드 쪽으로 기울었다. 시리아 내전을 분석하는 수리야크맵에 따르면 5월 말 현재 시리아 국토 18만5000㎢ 중에 62.17%는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홈스, 하마, 라타키아, 데이르에조르 같은 도시들이 정부 통제를 받고 있다. 쿠르드가 주축이 되고 아르메니아계, 체첸계 등이 가세한 시리아민주군(SDF)이 27.7%를, 주로 터키의 지원을 받는 또다른 반정부군이 9.26%를 차지하고 있다. IS 손에 남아 있는 곳은 1.15% 뿐이다.

 

판세가 거의 정해지자 재건 논의가 고개를 든다. 아사드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에 4000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올해 시리아 정부 예산은 겨우 90억달러이고 재건사업에 책정된 돈은 달랑 10억달러다. 시리아 내 모든 은행의 자산을 합쳐도 1조7000억파운드, 약 35억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자란 재건비용은 어디서 메울까. 정부가 탐내는 것은 피란민들의 재산이다.

 

2017년 1월 시리아 타르투스 항구에 도열한 러시아 병사들. 타르투스에는 러시아가 옛 소련권 이외 지역에 보유한 유일한 군사기지가 있다.  사진 스푸트니크뉴스

 

아사드 대통령은 2015년 5월 주지사들과 시장들이 투자회사를 만들 수 있게 한 ‘포고령 19’를 발표했다. 이듬해 1월에는 ‘공공-민간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공공자산에 민간기업들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법안 10’이다. 이 법안은 거주자가 소유를 증명하지 못하는 부동산을 정부가 몰수할 수 있게 했다. 난민들이 남기고 간 집과 땅을 정부가 갖겠다는 것이다. 난민들 재산을 빼앗아 친아사드 인사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 조치가 발표되자 다마스쿠스 주지사는 새 도시를 개발할 투자회사를 만들고 사장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법안 10에 따라 발표된 개발계획 중 가장 큰 것은 다마스쿠스 시내를 재건하는 ‘마로타시티 프로젝트’인데, 포즈 같은 개발업자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 게 뻔하다.

 

재건 비즈니스, ‘대리전 2라운드’

 

내부에서 조달하기엔 돈이 턱없이 부족한 아사드 정부는 결국 외국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두바이의 저널리스트 마크 타운센드는 지난달 TRT월드 기고에서 “시리아를 둘러싼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진단했다. 내전에 개입한 나라들이 재건 비즈니스를 놓고 또 한 차례 대리전을 벌일 것이라는 얘기다.

 

러시아는 지중해에 면한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구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 러시아가 기지 땅을 빌려쓰는 것이지만 형식은 ‘투자’다. 아랍 매체 알모니터에 따르면 러시아 기업 스트로이트란스가스가 지난 4월 5억달러를 투자하는 대가로 49년간 이 항구를 운영하는 계약을 맺었다. 홈스 지역의 전력공급과 다마스쿠스 공항철도 건설도 맡기로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시리아 정부와 에너지 채굴계약을 했다. 그러나 에너지 부문에서 당장 수익을 거두기는 힘들어 보인다. 시리아 석유매장량 25억배럴(추정치) 중 95%는 SDF가 장악한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란은 최근 시리아 정부와 다마스쿠스에 주택 20만채를 새로 짓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란은 미국의 제재를 받으면서도 연간 60억달러 가량을 시리아에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제재 대상인 혁명수비대는 이란 최대의 경제집단이기도 하다. 유라시아뉴스는 “이들이 중국 기업들과 손잡고 시리아 통신·자동차 시장을 장악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을 방문한 왈리드 무알렘 시리아 외교장관(왼쪽)이 지난 18일 베이징의 댜오위타이 영빈관에서 왕이 외교부장과 공동기자회견을 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베이징 A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같은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 내전 기간에 반정부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최근엔 은근슬쩍 아사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올초 아부다비에서는 ‘UAE-시리아 심포지엄’이라는 이름으로 민간기업들 포럼이 열렸다. 사우디와 UAE는 다마스쿠스의 대사관도 재개관했다. 이들은 시리아에서 경제적 이익을 거두기보다는 이란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베이징 쳐다보는 아사드

 

지난해 1월 뉴스위크는 “아사드의 시리아 장악, 최대 승자는 중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국 언론에 늘 등장하는 뻔한 헤드라인이지만, 현실의 일면을 담고 있다. 아시아타임스는 무알렘 시리아 외교장관이 최근 베이징 방문에서 재건 지원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내전이 시작된 이래로 무알렘 장관은 2012년과 2015년, 그리고 이번까지 3차례 중국을 찾았다. 아사드 정권과 싸우는 이슬람 무장세력 중에는 중국이 미워하는 위구르 단체 ‘투르키스탄 이슬람당’ 조직원도 있다. 시리아는 중국을 향해 ‘공동의 적’을 강조하면서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아사드 정권과 공식적으로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7년 4월에 70여개국 대표들이 참여한 시리아 재건회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고, 같은 해에 ‘시리아 재건 무역박람회’를 열었다. 지난해와 올해 중국이 시리아에 투자한 돈은 20억달러 정도이지만 지난해 7월 중국-아랍협력포럼을 개최하면서 향후 23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시리아 옆에 있는 레바논의 항구도시 트리폴리가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 계획 노선 위에 있는 이상, 시리아로도 돈이 들어갈 것은 확실하다. 중국은 시리아 홈스와 트리폴리를 잇는 철도를 짓는 계획을 지난해 10월 발표했다. 중국 국영석유회사 CNPC는 시리아의 양대 석유회사인 SPC, 알푸라트석유에 투자를 했다. 무알렘 장관은 이번 방중에서 지중해 항구도시 라타키아에 특별무역지대를 만드는 구상을 논의했다.

 

인도도 시리아를 기웃거린다. 인도는 내전 발발 전인 2009년에 시리아 인프라건설 계약을 수주했다. 더타임스오브인디아는 지난달 인도 정부가 시리아에 사절단을 보내 협력계약을 재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인도적 재앙도 계속되는데, 시리아를 둘러싼 논의는 부동산과 석유로 이동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식처와 의약품이다. 하지만 그들을 맞는 것은 집과 의사들이 아닌 포즈 같은 상어들과 외국 자본이 짓고 있는 빌딩들일지 모른다.


목사님을 만나고 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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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난지도에 나를 데리고 가주신 목사님이 계셨다. ‘쓰레기마을 사람들’을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1983년.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목사님과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생생하다. 그분 인척이 울엄마와 아는 사이라 얼마 전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여전히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고, 가끔 신문에 내가 쓴 글도 읽었다고 하셨댄다.

 

내 책의 에필로그를 쓰면서 난지도의 기억도 짤막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목사님 생각이 났다. 지난 토요일에 36년만에 목사님을 만났다. 늙으셨다. 국민학생이던 내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으니. 내 책을 선물해드렸다.

목사님은 그 조그만 개척교회(당시엔 전도사님이셨다)를 만들 무렵에 난지도 빈민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근육병 장애인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셨다. 당시에 난지도엔 따라가봤지만 장애인들과도 함께 하셨던 것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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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까지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신 건 이해되지만(법학 전공이시니) 태권도 때문에 같은 대학에서 학생들 생활체육 지도도 하셨다고. 벌써 오래 전에 가라테 국제심판 자격증도 따셨고. “내가 50 될 때까지도 근육장애인 업고 다녔다. 근데 삐끗 하니까 ‘목사님 이제 업지 말아요’ 하더라. 그래서 요샌 가벼운 애들만 안아서 옮겨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하세요, 여쭸더니 “하나하나 차례로 하면 되지”라고 하셨다. 세상에나.

한 몇년 난지도 다니니까 거기 사람들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오고. 그러면 가서 의논해주고. 장애인들이랑 한 몇년 같이 하니까 또 그렇게 이어지고. 그렇게 ‘차례로’ 하면 된다는 어마어마한 얘기...를 마치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말씀하셨다. 운동은요? 하루 한 시간만 하면 되는데, 라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신다. 그날은 얘기 안 하셨지만 학교에서 퇴직한 뒤에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신 모양이다.

목사님이 일하신 개척교회는 그 시절 우리 건물 4층에 세들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을 허물고 아버지가 빚내어 지은 건물이었다. 혹시 내가 건물주 딸인 걸로 오해하실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몇년 못 가 울아부지가 그 작은 건물을 말아드셨고 ^^;; 우리 가족은 그 동네를 떠났다.


며칠전 택시를 타고 우연히 그 동네를 지났다. 역시나, 상전벽해처럼 건물은 헐렸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우리집 자리엔 상가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동네, 목사님은 아직도 그 동네에 사신다고 했다. “거기 시민아파트 자리가 공원이 됐어. 산책로도 있고 근사해.” 내가 잊었던 우리 집, “그 건물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까지 내가 다 봤다”고 하셨다. 집 옆에 교회를 만들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작은 빌라를 쓰고 있는 것 같고, 소속된 '교단'은 없다고 한다. 

헤어지기 전에 목사님께서 쓰신 책을 내게 한권 주셨다. 집에 와서 펼쳐 몇 장을 읽었다. 목사님께 내가 드린, ‘졸저’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저 자료와 인상들을 모았을 뿐 삶이 담겨 있지 않은 내 책이 너무 부끄러웠다. 반갑고 기뻤고, 돌아서자마자 부끄러웠던 하루였다.

[라운드업] 연표로 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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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정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중동 불안정의 '원죄' 격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입니다. 통칭 '중동분쟁'이라 하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가리키죠. 사실상 이스라엘이 서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고 때리고 죽이는 것이니 '분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만. 그간의 일들을 연대 순으로 살펴봅니다.


열강에 의해 결정된 '유대국가 수립' 

1917 

발단은 영국의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당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 즉 아랍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만, 영국은 자기네가 점령하고 있던 이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유대인들과 약속을 합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등 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된 바 있죠. 2000년 전 자기네들이 살았다고 주장하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위 '귀환' 때문에 시끄럽던 차였습니다.)


영국 총리였던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


1920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따라 일부 지역을 위임통치 지역으로 만들고, 그 외 아랍 지역에는 '요르단 왕국'을 세우기로합니다. 다만 요르단도 영국의 보호령으로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1929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유대계 이주자들과, 원주민들인 아랍계 주민들 간 유혈충돌이 일어납니다. 

(훗날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령,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땅이 됩니다만 이스라엘이 끝내 무력 점령해버리죠. 지금도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불법 점령하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귀속문제'라는 겁니다)

1936

나치를 피해 독일 유대인들의 팔 이주가 늘어나면서 역내 유대인 인구비율은 8%에서 30%로 급등합니다.


1939   

2차 세계대전(유럽전선) 발발. 영국은 아랍계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 독립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알 나크바, 이스라엘의 건국

1946   

강경파 시오니스트 메나헴 베긴(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죠)이 이끄는 유대 테러집단 이르군이 예루살렘 시내 다윗호텔에 차려져있던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당국을 공격해 91명이 사망합니다.


1947   

시오니스트들은 팔' 영국 당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합니다. 1939년부터 영국이 실시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제한조치에 대한 반감이 쌓여온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유대국가 수립을 둘러싸고 유대계 이주자-팔레스타인 아랍계 원주민들 간 충돌이 계속됩니다.


'알 나크바'로 쫓겨나는 팔레스타인인들


1948   

이스라엘이 마침내 정부수립을 선언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건국', 팔레스타인인들 입장에선 '알 나크바(대재앙).' 이스라엘은 유엔이 중동분할계획에서 아랍계 영토로 정해놓은 지역까지 공격,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내쫓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에는 거대한 팔 난민촌이 형성돼 수십년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가자지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난민촌이라 할 수 있는데요.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에 살던 이들이 이집트 국경에 맞댄 가자라는 좁은 땅으로 쫓겨나 엄청난 인구밀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이제 그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고향'에서 살아보지 못한, '난민 2세대, 3세대'가 대부분이 되었겠지만요.)


1949   

이스라엘이 유엔에 가입합니다. 유엔은 예루살렘을 국제 관할 하에 둔다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트랜스요르단은 요르단 하솀왕국으로 변경됩니다. (하솀 Hashem 은 요르단 왕가의 이름인데요. 무함마드의 후손이라 자처하지요.)

1950   
요르단강 서안이 요르단에 병합됩니다. 가자지구는 이집트 지배 하에 들어갑니다.
팔 난민 96만명이 유엔 구호캠프에 등록됩니다. 이로써 난민촌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됩니다.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 두 지역은 나중에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됩니다만, 둘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툭하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서안과 가자 사이의 소통을 막습니다.)



1956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수에즈 위기'가 닥칩니다.

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와 보조를 맞춰 이집트를 공격하고 시나이반도를 점령합니다(2차 중동전쟁).


1957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철수하고, 가자지구는 유엔 통치령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1964 

아랍연맹의 지원 하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설됩니다.

1967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과 6일 전쟁(3차 중동전쟁)


1967년 전쟁 전후, 이스라엘 영토의 변화



1968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여객기 납치 테러. PFLP는 팔 해방운동 진영 내 좌파 그룹입니다. PLO(그리고 그 주축인 '파타')가 부르주아 운동단체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와 독립국가 건설을 동시에 지향하죠.

PLO의 투쟁과 오슬로 평화협정

1969   
아라파트가 PLO 집행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중동분쟁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합니다.

1970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 ‘검은 9월단’ 게릴라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참고로... 요르단은 나라도 크지 않고 변변한 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후세인의 통치시절 개인적 역량에 크게 의존했더랬죠. 후세인 국왕은 이른바 '줄타기 외교'의 달인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억압하고, 이스라엘과 협상하고, 그러면서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내는. 그렇다면 요르단 국민들에겐 '좋은 국왕'이었던 것으로 보이죠? 실제로 지금도 요르단에서는 후세인을 칭송하는 이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후세인이 숨졌을 때 빌 클린턴이니 누구니, 세계 쟁쟁한 지도자들이 발벗고 달려와 조문한 것도 그의 외교력을 방증했달까요. 문제는, 요르단에서 '팔 난민들을 탄압한다'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요르단은 국민의 55% 이상이 팔레스타인계거든요. 과거엔 한 나라 한 민족이었으니까요. 심지어 후세인을 계승한 압둘라2세 국왕의 왕비인 라니아도 팔레스타인계입니다.)


1971   

가자지구 난민촌 지도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이 PLO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나섭니다. 야신은 훗날 가자지구에서 무장정치조직 '하마스'를 창설하죠. 그리고 2004년 이스라엘의 표적암살로 무참히 살해됩니다.


하마스를 창설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여러 신체적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1972   
팔 '검은9월단' 게릴라들이 독일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의 숙소를 공격, 테러를 저지릅니다. 이 사건은 팔 반군들이 '테러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세계에 심어준 계기가 됐습니다.

1973   
라마단 달인 10월(유대력 욤키푸르)에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4차 중동전쟁). 
아랍 산유국들은 서방에 맞서 석유 수출중단을 선언합니다(1차 오일쇼크).

1974   
야세르 아라파트가 유엔 총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합니다. (▶참고 야세르 아라파트)
"지금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내 손이 올리브 가지를 놓지 않게 해 달라"

1975   
레바논 특유의 기독교 일파인 마론파는 레바논 내에서 PLO가 세력을 확대하자 불안감을 느끼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로써 레바논 내전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개입으로 이어집니다. 레바논 땅에서 사실상 대리전이 벌어진 거죠. 30년 가까이 레바논은 사실상 시리아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이 관계는 2004년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에 와서야 끝나죠. '백향목 혁명'은, 시리아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괴한들이 탈 시리아 노선을 추진했던 라피크 하리리 전총리를 암살한데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고 나서면서 촉발됐습니다. 혁명 뒤 2년여에 걸쳐 시리아군은 레바논에서 철수합니다.)


1977

이집트의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점점 밀착되더니 마침내 예루살렘을 방문, 크네세트(이스라엘의 의회)에서 연설합니다. 아랍권 전역에선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에 거센 반발이 일었습니다.

1978   

사다트-메나헴 베긴(이스라엘 총리)-지미 카터 3자가 미국 캠프데이비드의 대통령 별장에서 손을 잡습니다.

1979   

이집트·이스라엘이 마침내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1981   

사다트가 이집트 군부 내 이슬람 과격파에 암살됩니다.

1982 

레바논 남부 시아파 조직 헤즈볼라가 무장투쟁을 선언합니다. 레바논 전쟁이 시작됩니다. 

아리엘 샤론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군대를 보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합니다. 악명높은 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팔랑헤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을 저지릅니다. 

(당시 샤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군인이었던지, 아랍권에선 우는 아이에게 '샤론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지요. 샤론은 샤브라-사틸라 난민촌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나중에 주택장관이 됩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 땅 안의 '유대인 정착촌'들이, 샤론 주택장관 시절 만들어진 겁니다. 무력으로 땅따먹기를 해서 불법점령한 뒤 유대인 마을 만들고, 그곳들 지킨다며 군대 집어넣어 팔레스타인 억압하고...
나중에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데요. 2000년대의 일입니다만. 결자해지하고 싶었는지 정착촌 해체에 직접 나섭니다. 아쉽게도 하필 그 때에 샤론이 뇌졸중으로 쓰러져버리고, 이-팔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1985   
이스라엘군이 튀니지 수도 튀니스의 PLO 본부를 공습합니다. 이후 북아프리카의 PLO 기지들은 사실상 사라집니다.

1987   
팔레스타인 1차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시작됩니다.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10대, 20대들이 돌 들고 거리로 나선 겁니다. 이전까지의 해방운동 주도세력이 아라파트 같은 '난민 1세대'였다면, 이 때부터는 한번도 나라를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가 저항의 주축으로 나섭니다.

1988   
가자지구에 이슬람저항운동, '하마스'가 창설됩니다. 팔레스타인국민협의회(PNC)는 이 해 11월에 독립국가를 선언합니다. 25개국이 팔 망명정부를 승인합니다.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 제네바 특별회의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을 함축한 결의안을 받아들입니다.

1993   
이-팔 오슬로 협정이 체결됩니다. 오늘날까지 중동평화 구상의 결절점으로 평가받는 협정이죠.

1994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탄생합니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은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습니다. 라빈과 아라파트, 그리고 이스라엘 부총리였던 시몬 페레스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합니다


1995   

오슬로 협정에 이은 오슬로II 협정이 체결됩니다만, 라빈은 유대극우파 카흐네차이에 암살됩니다.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 


1996

아라파트가 PA수반으로 선출됩니다. 

(지금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입니다만, 여전히 국내 일부 언론들은 아라파트의 뒤를 이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을 '자치정부 수반'이라 표기하곤 합니다. 그러면 안되는데... )

2차 인티파다와 이스라엘의 막가파식 전횡

2000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철군합니다. 

론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을 일부러 방문해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해서 샤론은 팔레스타인 2차 인티파다를 촉발시키고, 자국 내 우파들을 결집합니다.


알 아크사 모스크


2001   
샤론이 총리에 선출됩니다. 평화정착은 멀어져만 갑니다.

2003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사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등지에서 팔레스타인 유혈살상을 계속합니다. 
수년에 걸친 2차 인티파다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팔 주민 수천명을 학살했습니다.

2004   
아라파트가 사망합니다. 한때 '아부 마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마무드 압바스가 팔레스타인 대통령이 됩니다.

2005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합니다. 하지만 봉쇄와 탄압은 계속됩니다.

2008  
12.28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합니다. 명분은 팔 측의 로켓포 공격을 중단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009  
1월 3일 이스라엘 지상군이 가자를 침공합니다. 이어 가자지구 유엔본부까지 공격합니다.


2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이미 90년대 한 차례 총리를 지낸 우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합니다.

2010  
5월에는 가자로 가는 구호선박을 공격, 9명을 사살합니다.

2012  
11월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미사일 공격,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민간인 살상으로 다시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2014

6월 2일 7년간의 분열을 끝내고 파타와 하마스가 통합정부를 구성합니다.

7월 8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며칠 뒤 지상군까지 투입해 침공합니다.



2015

7월 31일 유대인들이 서안의 마을을 습격해 18개월 아기 알리 다와브셰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 사건 뒤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대도시 등지에서 서로를 노린 흉기 공격과 총격 등이 잇따랐습니다. 


2016

양측 민간인들 사이의 공격과 충돌이 1년 내내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는 계속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들을 확대합니다.

12월 23일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에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합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이스라엘에 불리한 안보리 결의안을 비토하지 않고 기권해버립니다.



2017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팔 '두 국가 해법'까지 무위로 돌리려는 행보를 계속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12월 5일 결정합니다. 하마스는 "지옥 문을 연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습니다.


[심진용 기자, 이스라엘을 가다] (1) 유대인도 무슬림도 “트럼프는 미쳤다” 

[라말라를 가다] 돌을 든 아이들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이 다 차지하려 할 것” 

9일(현지시간) 저녁 팔레스타인의 임시 수도 라말라 거리에사람들이 얼굴을 가린 채 모여 있다. 라말라|심진용 기자


어차피 상황은 최악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모욕적이지만 당장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도 지금 당장은 자세를 낮추고 있다. 아랍의 분노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트럼프의 발언을 발판 삼아 이스라엘이 한층 더 강한 압박에 나설 가능성은 있다. 6살 아들과 함께 쇼핑을 나온 알리샤(28)는 그게 겁난다고 했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지 우리 대통령이 아니다. 대체 무슨 권리로 트럼프가 우리 나라, 우리 수도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알리샤가 물었다. 



2018


5월 14일 미국이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제 2의 '알나크바', 재앙의 날입니다. 이스라엘군이 발포해 팔레스타인 사람들 50여명이 숨졌습니다.



7월 19일 크네셋(이스라엘 의회)가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선언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스라엘 인구 900만명 가운데 유대인은 74.2%, 아랍계가 20.9%, 그 외 4.8% 정도로 구성돼 있는데 인구의 4분의 1을 배제하는 법안을 만든 겁니다. ‘인종주의’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2019


3월 25일 트럼프는 시리아 남서부 골란고원에 대해 이스라엘의 영토 주권을 인정하는 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법점령한 뒤 유엔이 반환을 촉구해왔고 미국조차 반세기 넘게 골란고원 문제에서는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편들지 않았는데 트럼프가 뒤집었습니다.

 


트럼프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주도 하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배제한 이·팔 평화계획도 만들었습니다. 6월 22일에 그 중 경제부문을 가져와 ‘번영으로 가는 평화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해법 없이 돈 얘기나 하자는 이 계획에 반발했습니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멕시코? 베트남? 미·중 무역전쟁, 컴퓨터 공장들은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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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컴퓨터는 세계에서 연간 1억6000만 개가 유통된다. 스마트폰(14억 개)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사고팔리는 전자제품이다. 세계 1·3위 컴퓨터 제조업체인 HP와 델은 지난해 중국의 충칭과 쿤샨에서 노트북 7000만 개를 만들었다. 이 기업들의 대규모 공장이 있는 충칭은 세계 ‘컴퓨터의 수도’라고 불린다. 하지만 언제까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HP와 델이 중국 내 노트북 생산량을 30% 줄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의 정보기술(IT) 기업들, ‘테크 자이언트’들이 미·중 무역전쟁을 피해 중국 내 생산시설들을 옮기려 하고 있다. ‘중국 엑소더스’가 이미 시작됐다는 보도가 잇따른다. 일각에선 이들의 탈중국 흐름이 미국의 보복관세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각국의 관심은 중국을 떠나는 기업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 G2 무역갈등의 수혜자는 누가 될지에 쏠려 있다.

 

지난 5월 중국 장쑤성의 롄윈강시에 있는 공장에서 직원들이 휴대전화용 카메라 조립작업을 하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이 고조되자 각국의 정보기술 기업들이 중국 내 생산시설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

 

“애플도 MS도 레노보도 떠난다”

 

차이나 엑소더스를 이슈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지난 3일의 닛케이아시안리뷰 보도였다. 닛케이는 HP와 델,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소니, 닌텐도 등이 이미 중국 생산라인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구글은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머더보드 생산기지를 대만으로 옮겼으며 콴타컴퓨터와 폭스콘, 인벤텍도 서버 생산시설을 대만과 멕시코, 체코로 옮겼다고 전했다. 레노보, 에이서, 에이수스테크도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탈중국 움직임이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이 매체는 업계 관계자들을 인용해 “중국 내 생산시설 중 대략 30% 정도를 외국으로 빼낸다는 데에 업계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적었다.

 

중국 환구시보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에 이튿날 이를 반박하는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설득력은 적었다. HP는 “미래의 계획과 관련해서는 코멘트할 수 없다”는 응답을 글로벌타임스에 보내왔고, MS는 “닛케이 보도는 부정확하며 중국 생산시설을 옮길 계획이 있다면 우리가 직접 발표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글로벌타임스가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있던 때에,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대만 기업들의 이전을 내다본 시티뱅크 보고서 내용을 보도했다. 대만 기술업체들이 중국 본토에서 1000만 명가량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 회사들의 30~50%가 중국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뱅크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기업들의 제품이 중국 전체 수출량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중국에서 물건을 만들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100대 기업 중 37개가 대만계다. 이들이 공장 가동을 줄이면 중국에서 일자리 300만개가 줄어들 수 있다고 보고서는 내다봤다.

 

기대반 우려반 멕시코와 체코

 

중국에서 나가는 기업들은 생산시설을 어디로 돌릴까. 기존 생산시설이 많은 나라들이 우선적인 후보지다. 월드엑스포츠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각국의 컴퓨터와 관련기기 수출액은 총 3803억달러였다. 1위는 1542억달러 어치를 수출한 중국으로, 전체 수출액의 40.5%를 차지했다. 중국과 별도로 홍콩도 237억달러 어치를 팔았다. 2위 멕시코(7.7%)에 이어 네덜란드, 미국, 독일, 체코,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이 10위 안에 들었다.

 

응우옌 치 둥 베트남 계획·투자장관(오른쪽)과 세실리아 말스트롬 유럽연합(EU) 통상담당 집행위원(가운데)이 지난달 30일 하노이에서 베트남-EU 자유무역협정과 투자촉진협정에 서명한 뒤 협정문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PA

 

이 나라들 중 생산비용과 산업구조 특성 등을 고려할 때 중국을 대신할 곳으로 멕시코와 체코, 아시아 국가들이 거론된다. 닛케이 보도에서 보이듯 일부 기업들이 이미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의 생산라인 가동을 늘렸다. 하지만 멕시코의 셈법은 복잡하다. 멕시코는 중국과 함께 미국과 무역갈등을 빚고 있는 나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 제품의 수입관세를 올리겠다고 공언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부터 시작해 매달 5%씩 올려 올 10월에는 멕시코산 컴퓨터·전자기술제품의 관세를 25%로 만들 방침이다. 고프로와 레노보 등 멕시코 생산량이 많았던 기업들은 오히려 멕시코 탈출을 고민해야 할 처지다.

 

체코도 사정이 단순치 않다. 생산설비가 아니라 중국, 특히 화웨이와의 관계가 문제다. 중국은 유럽연합(EU)으로의 수출기지로 그동안 체코에 투자를 많이 해왔다. 화웨이는 4년 전부터 체코의 통신인프라를 깔아왔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체코 정부는 “화웨이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는 “체코의 돌변에 화웨이가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밀착됐던 밀로스 제만 체코 대통령이 ‘반 화웨이’로 돌아선 데에는 미국의 압박이 작용했을 수 있다. 미국은 각국 정부를 상대로 화웨이 위협론을 설파해왔다. 지난 2월 중동부 유럽을 순방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대놓고 ‘화웨이 위협’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다. 기업들이 멕시코로 가려면 중국 공장과 비교해 관세를 꼼꼼히 따져가며 손익을 계산해야 하고, 체코로 가려면 화웨이와 관련된 보안 걱정에 더해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할 판이다.

 

베트남, 최대 수혜자 될까

 

중국 남쪽 국가들은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베트남은 지난달 30일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이 협정의 효과를 노리고 이미 중국 기업들조차 베트남 생산시설을 늘려오고 있었다고 전했다. 싱크탱크 메콩이코노믹스의 경제분석가 애덤 매카티는 이 신문에 “EU와의 협정으로 중국에서 베트남으로의 공장 이전이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HP는 태국과 대만 공장의 생산용량을 늘리고 있고, 델은 대만과 베트남·필리핀 생산라인을 시험가동 중이다. 아마존 킨들과 닌텐도 게임콘솔은 베트남 생산량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MS는 태국과 인도네시아로 옮겨갈 공산이 크다.

 

반면 이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 IT전문매체 실리콘앵글은 시장분석가들을 인용해 “새 생산시설을 돌리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여러 기업들이 길게는 1년 전부터 이전을 준비해왔지만 중국 밖으로 급속히 빠져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IT 분석가 패트릭 무어는 이 매체에 “컴퓨터나 서버업체들은 이전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겠지만 스마트폰 회사들은 옮겨가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애플만 해도 그동안 폭스콘과 함께 구축한 중국 내 생산시설의 기술자들만큼 숙련된 노동력을 다른 나라에서 급히 확보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애플의 경우 기술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일부 생산라인을 미국으로 옮기려 한다고 보도했다.

 

숙련된 노동력 측면에서 볼 때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결국 인도가 유리해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인도 정부가 중국을 떠날까 고민하는 기업들에게 손짓하기 위해 우호세제를 적용해주거나 일정기간 세금을 없애주는 ‘택스 홀리데이’를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년 전부터 ‘메이크 인 인디아’ 이니셔티브를 내세워 공장 유치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CNN방송은 올 1~5월 미국의 중국산 제품 수입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12% 줄어든 대신 베트남, 태국, 방글라데시, 한국산 수입액이 늘었다면서 한국을 포함한 4개국을 미·중 갈등의 수혜국으로 꼽았다.

 

무역갈등 탓만일까

 

각국 기업들이 탈중국을 준비하는 것이 비단 미·중 무역갈등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5월 미국 상공회의소는 상하이의 외국기업 250곳 중 40% 가까이가 중국 공장의 이전을 고민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은 지난달 7일자 기사에서 “중국의 생산비용, 특히 임금이 올라가는 것도 글로벌 생산체인의 변화를 부르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포춘 분석을 보면 광둥성 노동자들의 최저시급은 2008년 4.12위안에서 지난해 14.4위안으로 올라갔다. 컴퓨터·정보기술 분야는 탈중국 흐름이 늦게 시작됐지만 섬유·의류공장 등 저임금 업종은 이미 동남아로 옮겨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숙련기술이 필요한 업종도 결국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미국의 ‘보복’이라 주장하지만, 중국 당국과 기업들의 행태가 세계에 보안 우려를 안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것이 ‘슈퍼마이크로 사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수퍼마이크로라는 서버업체는 미국 관세위협이 아닌 보안 문제로 최근 중국을 떠났다.

 

지난해 블룸버그통신은 이 회사 경영진이 자사 마더보드에 스파이칩을 심으라는 중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회사측은 부인했지만 신뢰도가 추락했다. 이 회사 제품을 공급받아온 애플은 미 의회에 서한을 보내 블룸버그 보도를 공식 부인했고 팀 쿡 최고경영자가 나서서 기사 철회를 요청하는 등 시끄러운 파장이 일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피할 수 없는, 중국 당국의 정치적 개입 우려와 기업들의 리스크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만경제연구소(TIER)의 다슨 추 연구원은 닛케이에 “부품 수급에 변동이 일어나고 생산비용이 올라갈 것이며, 중국 못잖게 미국 기업들에게도 충격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미·중 무역갈등이 세계 공장지도가 바뀌는 데에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다. 포춘은 “기업들이 중국 내 생산을 포기하기보다는, 중국을 생산본부로 활용하면서 (아시아 등) 곳곳의 생산망을 운영하는 방식이 확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19년에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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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률가들. 김두식. 창비. 1/4

 

 

 

2. 포스트 워. 토니 주트. 조행복 옮김. 플래닛. 1/21

 

3. 깨달음의 혁명.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사월의책 1/23

 

4. 내전. 조르조 아감벤. 조형준 옮김. 새물결 1/23

 

5. 도시의 역사. 조엘 코트킨. 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1/27

책 자체는 도시의 기나긴 역사를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쭉 훑고 있고 논지도 명확해서 괜찮았는데, 번역이 엉망. 로마 인구 3000명, 숫자도 틀림. 플로렌스의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의 시러큐스... 모든 걸 '미국 발음, 미국 표기'로 만들어버림. 

 

6. 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2/8

 

7. 이탈리아 현대사. 폴 긴스버그. 안준범 옮김. 후마니타스 2/13

 

8.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김수영 옮김. 이산 2/23

 

9. 누가 루뭄바를 죽였는가. 에마뉘엘 제라르, 브루스 쿠클릭. 이인숙 옮김. 삼천리 2/24

벨기에 사람들이 읽기 좋게 쓴 루뭄바 이야기. 팩트들이 많고 재미있었는데 편집자가 꼼꼼히 다듬지 않은 티가 역력. 

 

10. 북극을 꿈꾸다. 배리 로페즈.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3/2

 

11. 스스로 치유하는 뇌. 노먼 도이지. 장호연 옮김. 동아시아 3/2

대체의학 같은 분위기의 책인데 의외로 좀 재미있었음.

 

12. 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인물과사상사 3/8

신문 기고를 모아놓은 것인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 내가 몰랐던 서울...

 

13. 무질서의 효용. 리차드 세넷, 유강은 옮김. 다시봄 3/22

 

14. 과거의 목소리. 사카이 나오키. 이한정 옮김. 그린비 4/3

사카이 나오키의 박사논문이라고. 영어로 쓴 걸 일본어로 번역하고, 아마도 그걸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듯. 문장이 사카이 나오키 스타일로 엄밀하면서도 복잡미묘난해하긴 하지만 읽고 나니 뿌듯. 

 

15. 함락된 도시의 여자. 익명의 여인. 염정용 옮김. 마티 4/17

 

16. 도시의 승리. 에드워드 글레이저. 이진원 옮김. 해냄. 4/21

 

17. 신화의 이미지. 조지프 캠벨. 홍윤희 옮김. 살림. 4/21

 

18. 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이현웅 옮김. 갈라파고스. 4/23

 

19.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 에곤 바. 박경서, 오영옥 옮김. 북로그컴퍼니. 4/25

 

20. 엑소더스. 폴 콜리어. 김선영 옮김. 21세기북스. 5/21

 

21. 기지 국가. 데이비드 바인. 유강은 옮김. 갈마바람. 5/26

 

22. 약탈당하는 지구. 폴 콜리어. 윤승용, 윤세미 옮김. 21세기북스. 5/29

 

23.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6/12

 

24. 슬픈 열대. 레비스트로스. 박옥줄 옮김. 한길사. 6/16

 

25. 산 자에게. 마루야마 겐지. 강소영 옮김. 바다출판사. 6/17

 

26. 구아파. 살림 하다드. 조은아 옮김. 훗. 6/22

 

27.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개번 매코맥, 노리마쯔 사또꼬. 정영신 옮김. 창비 7/4


28. 남극 2041. 로버트 스원, 길 리빌. 안진환 옮김. 한국경제신문. 7/9


29. 넥스트 모바일:자율주행혁명. 호드 립슨, 멜바 컬만. 박세연 옮김. 더퀘스트. 7/12


30. 라이프 3.0. 맥스 테그마크. 백우진 옮김. 동아시아. 7/14


31. 선은 장벽이 되고. 프란시스코 칸투. 서경의 옮김. 서울문화사. 7/15


32. 마음의 아이들. 한스 모라벡. 박우석 옮김. 김영사. 7/15


33. 다윈의 물고기. 존 롱. 노승영 옮김. 플루토. 7/20

인공지능(AI), 자율주행, 기계에 대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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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사람 대신 일하는 것들에 대해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맥스 테그마크 <라이프 3.0>

재미있음!

 

에릭 드렉슬러 <창조의 엔진>

에릭 드렉슬러 <급진적 풍요>

 

닉 보스트롬 <슈퍼인텔리전스>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한스 모라벡 <마음의 아이들>

'원전' 격에 해당되긴 하지만 너무 오래전 책이라. 

 

호드 립슨, 멜바 컬만 <넥스트 모바일: 자율주행혁명>

호드 립슨, 멜바 컬만 <3D프린팅의 신세계>

재미있음

 

에릭 브린욜프슨, 앤드루 맥아피 <제2의 기계시대>

에릭 브린욜프슨, 앤드루 맥아피 <기계와의 경쟁>

재미있음

 

존 롱 <다윈의 물고기>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딱히 왜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음

 

피터 메익신스 외, <현대 엔지니어와 산업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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